빼앗긴 들에 봄은 왔건만, 타인이 가져다준 봄은 진정한 봄이 아니었다.

 

제주에서 최후의 결전을 각오했던 일본군은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떠나지 않았고, 무관심한 미군정과 그 이후 4.3으로 이어지는 악몽 속에서 제주섬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사회의 혼란 속에서 교육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도 야학 등을 통해 민족 계몽과 실력 양성을 도모했던 전통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졌다.

 

도민들은 어려움 속에서도 교육에서 미래의 희망을 찾았다.

 

제주교육은 힘든 역정 속에서 많은 문제점도 노출했지만 뚜벅뚜벅 한 걸음씩 어려움을 이겨내 왔다.

 

2만호에 이르는 제주일보의 지면에는 제주교육의 희망과 아픔, 시대상황이 그대로 녹아있다.

 

▲새 시대, 교육이 희망이다

해방을 맞은 도민들은 새 희망에 불탔다.

 

정치적인 격변 속에서 사회적으로도 혼란스러웠지만 새 시대에 대한 도민의 열망은 교육으로 표출됐고, 이는 학교 설립으로 이어졌다.

 

도민들은 자발적으로 학교 부지를 희사하거나 기금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학교 건설을 위한 노동력도 제공했다.

 

다른 지역에 진출한 도민은 물론 재일동포들까지 힘을 아끼지 않았다.

 

1947년  학교 설립에 대한 도민 열정은 김두현 제주도 총무국장이 도 승격 이후 발표한 교육사업 개요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초등교육은 도 승격 전 50개 교에서 95개 교로 늘었다. 중등교육도 농업학교 1개교 300여 명에 불과했으나, 농업학교에 고등과가 설치되고 대정.서귀공립초급중학교가 설립됐는가 하면 오현.향교사립초급중학교가 인가됐다. 사설학습 강습소도 10여 개소에 달하고, 1947년 내에 수산학교를 설치하기로 결정됐다. 사범교육은 초등교원 양성소를 설치해 제1회 졸업생 100여 명이 교편을 잡고 있으며 장차 사범학교로 승격하도록 중앙청에 교섭 중이다.”(제주신보(제주일보의 전신) 1947년 1월26일자)

 

제주도처럼 작은 지역에서 이렇게 많은 학교가 도민 스스로의 노력으로 세워진 것은 타 시.도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같은 기쁨도 잠시, 4.3의 거센 광풍이 제주사회를 휘감으면서 교육계도 막대한 피해를 감내해야 했다.

 

인적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물적 피해만 봐도 74개교 전소되고 3개교가 파괴되면서 교육환경이 황폐화했다.

 

이웃 간 불신과 갈등이 커지면서 초래된 지역공동체의 균열은 더 큰 아픔이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녀교육을 포기할 수 없다는 도민의 열의는 4.3 종료 후 학교 재건 노력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빠트릴 수 없는 게 재일동포들의 지극한 고향 사랑이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야 했던 재일동포들은 자리를 잡아가면서 향토 개발사업과 교육사업에 적극 참여했다.

 

이들은 학교 부지를 매입해 기부하거나 학교 건물 신축자금을 대기도 했고, 각종 기자재와 장학금을 아낌없이 지원해 고향 후배들의 발전을 뒷받침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제주일보의 지면에는 이들 재일교포들의 고향사랑이 알알이 박혀 있다.

 

한편 제주대학 설립에 대한 도민의 기대도 상당했다.

 

1952년 8월 8일 제주대학교의 전신인 제주초급대학이 국문.영문.법.축산 등 4개 학과로 개교했다. 대학설립 인가는 그에 앞서 5월 27일에 나 있었다.

 

이 같은 제주대 개교에 제주일보는 ‘문 열리는 배움의 전당-제주대 개교식 성황’ 제하의 기사에서 “학구열에 불타는 절해의 고도 내 수천 학생들 앞에 최고학부로서의 배움의 전당 제주대학의 문이 활짝 열렸다”며 도민의 성원과 기대를 전했다.(1952년 8월 9일자)

 


▲영원한 과제 ‘입시’

교육을 말할 때 좋든 싫든 우리의 현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입학시험이다.

 

제주일보가 ‘가슴 졸이며 두드리는 좁은 문-오늘 중등입시 일제히 실시’ 제하로 다음과 같이 전하는 반세기 전 도내 중학교 입학시험장 풍경은 지금과 비교해도 낯설지 않다.

 

‘겨울이 다시 뒷걸음 친 듯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는 입시장 너른 마당에 집합시간을 두 시간이 앞선 7시 조금 지나면서부터 벌써 연필과 책받이를 손에 든 수험생들이 드문드문 나타나기 시작-지각하면 입장하지 못하겠기에 아침밥 걱정으로 마음 놓고 밤잠 이루지 못했을 어머니들의 심상도 엿보이는 듯 하였다. 아들 딸을 입시장으로 들여보내 놓고 찬바람 부는 교문 밖에 근심스러이 서 있는 학부모들의 초조한 얼굴, 오늘 위해 1년 동안을 전력해 온 교사가 교정 한모퉁이에서 제자들에게 곰곰이 주의해주는 말을 수험생들이 귀담아 듣고 있는 모습도 이런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정 어린 풍경이었다. 여기에 바람 가려진 곳에 모여서 1분 동안 까지도 더 알아두려고 책을 뒤적이는 그룹, 외워둔 문답을 서로 주고받으며 머릿속 깊이 새겨두는 그룹, 연필을 깎고 있는 학생 모두가 비상한 전시준비상태였다. … 눈에 멀리 교문 밖에서 아직까지도 어린애들의 성공을 빌면서 선채 기다리고 있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인상 깊게 띄었다.’(1952년 4월 2일자)

 

입시와 관련한 제주출신들의 성과도 눈길을 끈다.

 

1982학년도 대입학력고사에서 당시 제주제일고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희룡(현 한나라당 사무총장.서울 양천갑)은 340점 만점에 332점을 획득하며 도내에서 첫 전국수석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제주신문 1981년 12월 30일자)

 

원희룡의 전국 수석 이후 제주제일고 송현주는 1985학년도 입시에서 전국 남자수석을, 서귀포여고 김수정은 1987학년도 입시에서 전국 여자 공동수석을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대기고 서준호는 1997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4백점 만점에 373.32점을 얻어 전국 수석을 차지함으로써 또다시 전국을 놀라게 했다.(제주일보 1997년 12월 5일자)


▲교육 자치와 위기, 그리고 새로운 도전

1963년 12월 교육법 개정에 따라 교육 자치제 부활로 1964년부터 도 단위 교육 자치제가 실시되면서 합의제 집행기관으로서의 교육위원회를 두게 됐다.

 

제주도교육청이 지금과 같은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초대 교육감에는 최정숙 당시 신성여중.고 교장이 선출됐다.(제주신문 1964년 1월 7일자)

 

1992년에는 강정은 당시 교육감이 첫 민선 교육감으로 재선돼 취임했다.(제주신문 1992년 2월 12일자)

 

2007년 첫 주민직선으로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도 현직이던 양성언 교육감이 재선에 성공하며 교육자치를 추진해 나갔다.(제주일보 2007년 12월 20일자)

 

그러나 교육 자치를 실현해 나가는 데는 시련도 많았다.

 

‘참교육 실천’을 내걸고 1989년 6월 11일 결성된 전교조 제주지부(당시 지부장 이영길)는 이후 참가자 해임 등 전방위적 압박을 버텨내야 했다.(제주신문 1989년 6월 12일자)

 

이와 달리 2003년 말부터 교육청 인사 비리 의혹 파문이 불거진데다 2004년에는 불법 선거운동으로 교육감 선거에 출마한 후보 4명을 포함해 43명이 구속되고 77명이 불구속되는 등 모두 120명이 사법처리 되는 초유의 사태를 빚기도 했다.

 

특히 이 같은 여파로 2004년 2월 10, 11일 이틀간 예정됐던 전.현직 교육감의 이.취임식이 모두 취소되면서 제주교육사에 오점을 남겼다.(제주일보 2004년 2월 10일자)

 

제주대와 제주교대도 총장선거와 관련해 우여곡절을 거쳤다.

 

제주 교육계는 이 같은 시련들을 한발 한발 극복하고 오늘까지 왔다.

 

2010년, 제주교육에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영어교육도시로 상징되는 글로벌화는 우리에게 기회이기도 하지만 위기상황일 수도 있다.

 

‘제주교육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사건’이라는 공립 국제학교는 이미 첫 삽을 떴다.(제주일보 2010년 10월 1일자)

 

그동안 글로벌화는 저 멀리 있는 남의 일처럼 여겨졌지만 이제 발등의 불로 다가온 것이다.

 

제주교육은 국제 경쟁력을 갖춘 시스템 구축 등 과제가 산적하다.

 

제주일보 2만호가 제주교육의 역사였다면, 3만호는 새로운 역사를 써갈 것이다.

홍성배 기자
andh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