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우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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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혼자서 사나흘을 걸어갔지요./ 발효의 시간이었지요.//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습니다.// 그대가 떠나고 난 뒤/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강색으로 칠한 이유도/ 그 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이문재의 ‘빨간 우체통’ 전문)

1970·1980년대 독재시대에는 빨간 색이 무척 미움을 받았다.

반공사상이 독기를 품고 있었던 시대였다. 똬리 튼 뱀 마냥.

당시 초등학생이 빨간 크레파스로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불자동차(119 화재진압차량)와 우체통이 고작이었다.

검은 색이 칠해진 나무 전봇대에 ‘반공방첩’과 ‘불조심’이 적힌 함석판이 생생하던 시절이었다.

독재시대에도 꿋꿋이 자기 색깔을 자랑하던 우체통이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고 한다.

1998년 485개였던 도내 우체통이 2003년 444개, 2005년 348개, 2007년 323개, 2008년 309개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지역 우체통 10개 가운데 4개정도가 사라진 셈이다.

이러다보니 길을 걸어 다니다가 우체통을 보면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누군들 우체통에 편지를 넣던 기억을 잊을 수 있을까.

가슴이 아프거나, 설레거나 또는 우쭐대거나 하는 사연을 담은 편지를 넣던 사람이면 말이다.

지금 도로에 서 있는 우체통은 구조조정 속에서도 살아남은 경쟁력 있는 우체통이다.

그러나 사실 소통을 위한 도구로써 우체통은 경쟁력이 없다.

휴대폰 이용, 휴대폰을 이용한 메시지, 또는 E-Mail을 통해 소통하는 게 훨씬 빠르다.

때문에 요즘 우체통에서 쏟아져 나오는 것은 각종 공과금 고지서나 기업체 홍보물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받고서도 그렇게 반가운 것들이 아닌 셈이다.

우체통 속에 있는 것은 사연이 아니라 통보나 홍보 같은 것 뿐 이다.

우체통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관공서나 기업체 등이라는 얘기다.

IT강국인 우리나라에서 빠르고 가벼운 통신문화가 대세인 요즘, 우체통은 지금 정부처럼 소통이 모자란 ‘먹통’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구촌 곳곳에서 시민의식이 높은 사람들은 느리게 사는 법을 선호하고 있다.

흙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인터넷에서 알려면 ‘바위가 부스러져 생긴 가루인 무기물과 동식물에서 생긴 유기물이 혼합된 물질’이라고 쉽고 빠르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젖은 흙이나 마른 흙을 직접 손으로 만져 느낄 수 있는 질감까지는 모를 것이다.

우체통도 마찬가지다.

우체통의 질감을 느끼려면 펜으로 직접 글을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는 느림을 겪어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중의 하나가/ 느리게 사는 법’은 아닐까.

‘우체통을 굳이 빨강색으로 칠한 이유도/ 지나치게 빠르고 가벼운 것에 대한 경고’인지 모르겠다.

추신:체질적으로 빨간 색을 미워하는 사람들도 우체통을 사랑해줬으면 한다.

대한민국 영토 끝점인 독도와 백령도, 마라도에 있는 우체통이 “이곳은 대한민국 영토”라며 온 몸이 빨개지도록 외쳐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박상섭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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