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의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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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 시인·4·3조사연구원

아버지는 일본 유학 중이었다.

어머니가 돌림병(장질부사)에 걸렸다. 아버지 동생의 결혼 날짜가 잡히자 아버지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가족들의 성화는 빗발쳤다. 다 하지 못한 공부를 놔두고 서둘러 고향 집에 왔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를 보자마자 눈을 감았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4·3이 터졌다. 어머니의 장례에 동생의 결혼까지 경황이 없던 아버지를 동경 유학생이라는 소문을 듣고 고향 마을 중학교에서 모셔갔다.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어느 날, 집에 순경이 왔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들’ 어디 가수과?”

할머니는 “모르겠다.”고 했다.

옆에서 듣던 내가 “아버지 학교에 가수다.”라며 말했다. 순경들이 돌아가자 할머니는 “모른다면 가만히 있지 않고 쓸데없이 말했다.”고 역정을 크게 내셨다. 내가 여섯 살 때였다.

순경들이 왔다간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마을에서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급히 어디론가 갔다. 법환리와 호근리 사이 ‘한원’이라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들것들이 왔다갔다 했다. 할머니가 들것 하나에 다가서더니 망텡이 같은 것을 쑥하고 들쳐냈다. 아버지였다.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입었던 옷과 피 묻은 다리가 보였다. 털썩 주저앉으며 할머니는 울었다. 나도 따라 울었다.

일곱 살이 돼 초등학교에 가게 됐다. 호적이 없어 숙부의 자식이 됐다. 학교 갔다 오면 보리 이삭 줍고 고구마 이삭을 주으러 다녔다. 땔감으로 솔잎 긁어오고 소똥도 주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졸업사진은 찍었지만 졸업장은 받지 못했다. 월사금을 내지 못해서 어렵게 6년을 다녔지만 졸업장이 없다. 할머니도 늙어서 더 이상 장사도 할 수 없게 되자 나를 종가집에 보냈다. 하루 종일 물을 길어야 했다. 열세 살 때였다.

식모살이도 아기업개도 충분히 할 나이가 됐을 무렵 서울 사람이 미용 공부를 시켜준다고 꼬드기는 바람에 서울로 갔다. 미용 공부를 시켜준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거기서 나와 닥치는 대로 일했다. 고향 집을 떠나온 지 30년 만에 미장원을 가지게 됐고 착한 남편도 만났다. 남편은 아버지처럼 선생님이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 내가 우리나라 일류대학을 졸업한 남편과 20년을 살았다.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떠나갔다.

다시 혼자가 됐다.

혼자가 됐던 여섯 살 아이는 다시 혼자가 됐다. 고향에 가고 싶어졌다. 아버지, 어머니가 그리웠다. 서귀포에 내려와 숙부를 만났다.

“네 아버지 4·3보상이 나오는데 너는 호적에 없어서…. 호적에 올라 있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아버지와 내가 호적상 부녀관계가 아님을 말하는 거였다.

눈물이 난다. 내 나이 85세. 세상 떠날 때가 가까우니 더욱 아버지가 그립다. 아버지 딸로 호적에 오르지 못한 게 너무 가슴 아프다. 이 세상 호적에 아버지 딸이 돼 저 세상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

그 날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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