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농로 벚꽃길 위, 사랑의 기억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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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2) 의녀 홍랑

홍랑, 정헌 조정철 부실(副室)…정절 지키다 숨져
홍문중, 국회의원·서울제주도민회 회장 등 지내
홍범서, 제주목 출신 무신, 정조 때 훈련판관 역임
홍범효, 조선시대 선비·서예가…문필로 유명해
홍병철, 한림읍 출신 국회의원, 6·25 전쟁 참전
지난해 3월, 전농로에서 왕벚꽃 축제가 열린 모습. 전농로 벚꽃길에는 홍랑의 무덤터 표지석이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3월, 전농로에서 왕벚꽃 축제가 열린 모습. 전농로 벚꽃길에는 홍랑의 무덤터 표지석이 있다. (제주일보 자료사진)

▲홍랑洪娘(여):?~1781(정조5), 수절한 의녀. 일명 홍윤애(洪允愛). 제주 유배인 조정철의 부실(副室)이다. 본관은 남양, 아버지는 홍처훈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이다. 1777년(정조1) 9월 11일 노론벽파에 속했던 정헌 조정철이 유배되어 도착, 1781년(정조5) 3월 제주목사 김시구가 부임, 유배인들에 대한 죄상을 심문하게 되자 홍랑을 문초하면서 죄인 조정철의 비행을 고하면 푸짐한 상을 주겠다고 유혹하였다. 김시구는 조정철의 반대파인 소론에 속했다. 이에 홍랑은 정절을 지켜 남형을 받아 끝내 죽었다. 


주성 안의 신호의 집에 적소를 마련하였다. 조정철의 심부름을 하던 홍랑은 연정으로 발전, 1781년 2월 딸을 분만했다. 홍랑은 윤 5월 15일 장형으로 죽으니 폭풍우로 천지가 온통 캄캄해졌으며 6월 2일 장례를 치렀다. 전해오는 말로는 홍랑이 죽은 다음 날로부터 8월 2일까지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았으니 이는 홍랑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기 때문이라고 수근거렸다. 1781년 홍랑의 상여가 나갈 때 정헌은 시로 읊었다. 

 

귤유성남삼척분(橘柚城南三尺墳) 
귤림 우거진 남문 밖 작은 봉분이네

방혼천재지원존(芳魂千載至寃存)
꽃다운 원혼 천년 두고 남으리

숙장계주수능존(椒漿桂酒誰能尊)
주과는 뉘가 마련할까!

일곡비가자루흔(一曲悲歌自淚痕)
구슬픈 상여 소리에 저절로 눈물 고이네!

 

 

조정철은 전국 각처로 옮기며 27년간의 유배 끝에 순조가 등극하자 죄에서 풀려 재등용된 지 7년만인 1811년(순조11)에 제주목사로 부임, 먼저 홍랑의 무덤을 찾았다. 정헌의 딸은 자라서 우면 곽지촌<과-물> 박수영과 결혼, 1남 2녀를 낳은 31세의 어머니가 되어 아버지 조정철과 극적인 만남을 가졌다. 따라서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의 명의로 ‘의녀홍랑지묘(義女洪娘之墓)’란 비를 세웠다. 

전농로에 있는 홍랑의 무덤터 표지석.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전농로에 있는 홍랑의 무덤터 표지석. (사진=제주관광공사 제공)

▲홍문중洪文中:1918(일제강점기)~1998, 정치가. 국회의원. 호는 남사(南史). 본관은 남양, 애월읍 어도리<도너미> 구몰동<구머리>에서 태어났다. 오사카의 흥국상업학교를 거쳐 일본대학 상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는 1941년 고국으로 돌아와 서울의 보인상업학교 교사로 재임, 1945년 광복 후 경기도 여러 지역에서 금융조합(농협 전신) 전무이사를 거쳐 1952년 귀향하여 제주금융조합 전무이사, 제주어민회 회장, 귀일중학교 교장, 성산수산고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 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북제주군선거구에서 출마, 차점자 김구(귀덕)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어 정치적인 포부는 좌절, 그 뒤 고려화재㈜ 상임감사, 서울제주도민회 회장을 역임했다. 


후일 학창시절을 회고하자면 상업학교 후배 현오봉, 문상택과 학교는 다르나 학우들인 채몽인, 김방훈, 김민환, 이길성 등이 떠오르는 얼굴이다. 이때 전학련(全學聯)을 통한 학생운동이 있었고 전국노동조합평의회와 전국노동조합총의회 등의 노동운동이 있어 본인은 전학련과 직간접으로 관여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다. 


▲홍범서洪範瑞:생몰년 미상, 정조 때의 무신. 본관은 남양, 제주목 태생이다. 제주목사 이홍운 때에 제주 무과초시에 홍범서 등 3인이 합격, 1790년 9월 전라병마절도사 이장한이 시취한 사실을 치계를 하였다. 


조정에서는 3인 모두 전시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1792년(정조16) 전시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훈련판관에 이르렀다.


▲홍범효洪範孝:1775(영조51)~1822(순조22), 선비. 서예가. 본관은 남양, 주성에서 태어나 문필로 유명하였다. 그는 빈흥유생으로 1817년(순조17) 11월에 썼던 해서(楷書) ‘진무청중수기(鎭撫廳重修記)’가 현재 전해진다. 

▲홍병철洪炳喆:1929년(일제강점기)~?, 본관은 남양, 국회의원, 한림읍 한림리<한-수풀>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 기획과장을 지내며 육영수 여사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1971년 5월 25일 실시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주도 제1선거구(제주시·북제주)에서 민주공화당 입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됐다. 당시 신민당 야당 후보는 2만1295표를 얻었고 그는 여당 후보로서 5만6129표를 얻어 압승했다. 


이어 유신헌법 이후의 1973년 2월 27일 실시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 불출마, 민주공화당의 양정규 의원이 당선됐다. 


1949년 제주농업중학교(6년제)를 졸업했다. 이듬해 6·25남침으로 육군으로 출정하고 보병학교를 나왔다. 


서울에서 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2년을 수료했다. 


재임 중 제주농고 동창회 회장이었으나 모든 회무는 부회장인 송봉규와 좌종식의 노력이 컸다. 


아울러 모교 이설 추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광양캠퍼스시절을 마감하여 새로운 노형캠퍼스시대를 출범시켰다. 


초대교장 최계순과 제4대 교장 최광식은 숙질간이었다. 


제농총동창회 회장 홍병철과 부회장 송봉규는 개교 60주년을 기해 1971년 5월 두 최교장 공덕비를 각각 모교 교정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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