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 단상(斷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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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시조시인

겨울 끝자락까지 비가 잘도 온다. 연일 비 날씨에 오히려 봄도 더디 오는 듯하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오일장으로 향하는 길엔 벚나무 가로수들이 나와 동행하려는 듯 붉은 눈을 부릅뜨고 있다. 벚나무 동지가 있어 한결 발걸음이 가볍다.

오일장 구경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내 취미생활 중의 하나다. 할머니는 가끔 집에서 낳은 강아지와 병아리를 오일장에 내다 파셨다. 난 할머니 등에 진 질구덕의 끈을 잡고 열심히 따라다녔다. 여기저기 눈요기하는 재미에 무엇을 사지 않더라도 그냥 편안하고 좋았다. 그런 이유인지 지금도 꼭 가야 할 일이 없더라도 오일장 날을 기다릴 때가 많다.

오일장은 저마다 웃고, 떠들며, 즐기는 사람들의 아우성은 세밀한 촉각을 깨우는 삶의 활력소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거기다 물질적인 풍요로움만 아닌, 희망까지 얹어 사고판다. 많은 사람이 아무런 경계 없이 ‘더불어, 함께’라는 정서의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삶을 충만하게 하는 힘이 있다.

오일장으로 들어서니 배시시 웃는 꽃들과 눈이 마주쳤다. 시클라멘, 달리아, 수선화, 아네모네.... 꽃들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꽃 화분을 둘러보다 꽃이 핀 천리향 작은 화분을 하나 샀다.

느릿느릿 흘러가는 사람들 속에 호객 소리가 귓전을 때리며 파도처럼 부서진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도넛 가게 앞에 줄을 섰다. 보고 있노라니 아줌마의 손이 어찌나 빠른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문득 ‘사람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생각이 스쳤다. 삶의 근본적인 의미와 본질적인 가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톨스토이의 책 제목이기도 한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원론적이면서 중요한 질문이겠다. 오일장이 깊은 철학과 생각의 세계를 심오하게 고민하는 장소는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오감을 통해 삶을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 권의 책을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아 삶의 방향이 바뀌듯 말이다. 오일장은 각각 삶의 이야기가 담긴 살아있는 도서관처럼 느껴진다.

세월의 흐름 속에 시설이 편리해지고 사고파는 물건도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건 할머니 품속처럼 따뜻한 정서이다.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이다.

걷다 보니 다시 호떡 가게 앞이다. 어찌 지나치랴.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줄을 섰다. 찌지직, 뜨거움의 소리가 날것처럼 생생하다. 침을 꼴깍 넘기며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내 차례까지 올 호떡을 세고 있다. 유독 향기 나는 꽃처럼 진한 추억을 새기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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