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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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숙 수필가

넓은 유리창 너머로 비추던 햇살이 잿빛으로 사그라진 어느 날 오후였다. 외숙모와 나는 호텔 커피숍에 앉아 주위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나름 신경 썼지만, 내 모습은 허름한 바지에 체크 남방 차림이었다. 남방을 아래로 잡아 당겨보고 자세를 꼿꼿하게 세웠다.

결혼하라는 부모님 성화에 못 견뎌 집에서 뛰쳐나와 혼자 지낼 때였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길이 안개에 둘러싸인 듯했다. 뿌옇게 성에가 낀 유리창을 문질러도 의욕만 앞섰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고향에서 양장점을 운영하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친구와 내가 찍은 사진을 본 고객이 아들과 내가 만나도록 주선한다는 거였다. 불쾌했지만, 사는 것이 막막한 때라 호텔을 운영한다는 말에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친구는 다시 부탁해 왔다. “가벼운 마음으로 차만 한 잔 마시면 돼.”

외숙모는 내 손목을 잡으며 지금이라도 나가자고 했다. 그때 듬성듬성한 머리숱에 그리 키가 크지 않은 그 남자가 목발을 짚고 들어왔다. 다리가 약간 불편하다고 들었는데 목발을 두 개나 짚고 있어서 속으로 놀랐다. 애처로움과 어긋난 마음이 두 갈래로 요동쳤다. 그 남자는 만나서 반갑다고 악수를 청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곧장 왔다며 매우 상기된 표정이었다. 인사를 나눈 외숙모는 놀란 표정으로 잘 만나고 오라며 먼저 나갔다. 그 남자는 다짜고짜 자기가 마음에 안 들어도 일주일 동안 만나자는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 커피숍에서 나왔다. 밖은 어둠에 싸였다. 그 남자가 서울에서 지낼 때 단골로 다니던 무교동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갔다. 마주 보고 앉아 와인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남자의 불편한 다리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 만나기로 하고 헤어져 돌아온 내 자취방이 무척 초라해 보였다. 돈이 많다는 데 결혼해 버릴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이틀째도 의무적인 만남이라 부담은 없었다. 그 남자가 먼저 와서 기다렸다. 나를 보더니 호텔에서 손님을 대하듯 상체를 가볍게 숙이며 정중하게 맞아 주었다. 갑자기 내 자세가 우아한 여인이 된 듯 고개를 까딱이고 꼿꼿해지는 게 아닌가. 그런 모습도 잠시였다. 그 남자와 다니면서 음식점과 커피숍으로 가려면 지하 계단이 많은 게 신경 쓰였다. 한 계단씩 목발을 짚고 내려갈 때마다 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렇다고 손을 내밀기도 어색했다.

그 남자는 아버지는 장성급으로 제대했고, 부모님의 성화로 맞선을 봤던 이야기도 들려줬다. 축구와 노래를 좋아하는데 맹인 가수 ‘스티비 원더’ 팬이란다. 한정된 시간의 만남이라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외숙모의 걱정스러운 이야기에, 고향에 계신 식구들은 큰일이라도 난 듯 난리였다. 아버지의 속달 편지에는 그 좋다는 맞선 자리 마다하고 네 멋대로 행동한다며 야단이었다. 외숙모 집 전화와 주인집 전화통이 불이 났다.

식구들의 염려에도 내 형편이 편하지 않을 때라 부모님에게는 어깃장 놓고 싶었다. 그러나 만날수록 그만의 성(城)에 근접하면 안 된다는 내 안의 소리를 들었다. 안갯속 같은 나의 삶이지만 세상과 맞서고 싶었다. 꼿꼿하게 버티고 있는 내 안의 그 무엇을 지켜야만 했다.

그 남자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날. 자욱한 안개가 깔렸다. 밤색 바바리코트를 입은 남자가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와 안개꽃에 싸인 장미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안개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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