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거상 김만덕이 환생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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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 C&C 국토개발행정연구소 소장/논설위원

조선 인조 7년인 1629년 8월 13일부터 순조 25년(1825년)까지 196년 동안 제주사람들은 육지로의 출륙(出陸)금지 당했다. 특히 제주여자가 육지로 시집가는 것은 철저히 차단됐다. 조정은 이 출륙금지령을 유민정책수단으로 삼았다. 그 결과 제주사람들은 육지와 단절될 수밖에 없었고, 조정의 수탈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만 갔다.


조선 중기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에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그리고 있다. “주민들이 한양에 가 딱한 사정을 전하려 하지만 수령들은 임금에게 알려질까 봐 진상차 가는 자(者) 말고는 아무도 제주를 떠나지 못 하게 했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에 오는 것을 마치 죽을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모두 피했고, 제주사람들은 빈손으로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다 해도 육지에 나가기를 마치 천당에 가는 것처럼 생각했다.”


이는 당시 제주사람들이 얼마나 육지를 가고 싶어 했는지를 반증한다. 고작 제주를 빠져나간 사람들은 남해안을 떠돌면서 고기를 잡고 해물을 따며 근근이 연명했다. 그럼에도 제주에서 빠져나온 사람의 수는 자꾸 늘어나기만 했고, 그 수(數)가 몇 천 명에 이르게 되자 이 문제가 조정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러자 조정은 제주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을 붙잡아 무거운 형벌을 내리기도 했다.


조정에서는 고려시대에 쌍돛을 다는 대중선을 진상했을 만큼 뛰어난 조선술을 지녔던 제주사람들에게 돛배를 만들어 출륙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사람들이 돛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다는 핑계로 먼 바다로 나갔다가 육지로 도망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제주에서 배가 육지로 나갈 수 있는 포구는 화북 포구와 조천 포구뿐이었는데, 그마저 배가 나갈 때는 진(鎭)을 지키는 자들이 출선기와 대조하면서 몰래 출륙하는 자들을 가려냈다. 그런 이유로 육지로의 출륙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러자 탐라국 시대부터 해상을 왕래하며 배를 건조하는 조선(造船)기술과 항해기술이 점차 단절됐다. 게다가 제주에서만 사용되는 제주어의 고유성과 제주만의 전통 풍속이 온전하게 보존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급기야 196년 만에 출륙금지령이 풀리자 제주사람들의 출륙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유배의 섬 제주의 낙후 상황은 유배·표착자의 서신·문헌 등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 바와 같다.

 
21세기 벽두에 중앙정부와 제주도는 관광산업 중심의 취약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한편, 제주섬이 국가경제 개방화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는 새로운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비전 제시와 역량 강화에 본격 대처해 나가는 듯했다. 


그런데 현재 미래로의 제주비전은 가물가물하고 그 추진 전망 또한 매우 불투명하다. 탐라인의 기상과 기개를 받들어 제주도를 활짝 열린 국제자유도시로 탈바꿈 하는 꿈을 아예 포기한 듯하다. 개방과 풍요로움보다 폐쇄와 낙후의 섬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치하려한다. 미래세대의 기상을 드높일 그런 제주로 가는 것을 주저한다. 


만약 생전에 금강산 가는 것을 학수고대(鶴首苦待)했던 제주거상 김만덕이 지금 당장 환생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어떤 충고(忠告)를 할까? 그것이 매우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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