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가 있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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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자 수필가

골목 안은 늘 한적하다. 집안에서도 들고 나는 미세한 소리까지 감지할 수 있다. 들리는 소리에 귀를 세워 대문을 연다. 테너 색소폰 선율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골목 안에는 은퇴한 시니어들이 산다.

둘째 아이가 수능 시험을 치를 무렵, ‘빈 둥지 증후군’이 생길 수도 있다는 걱정이 앞섰다. 인생 2막에 들어서면서 벗할 수 있는 악기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았다. 아이들이 떠나자 피아노와 플루트는 주인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남편이 즐기던 하모니카와 기타도 한쪽에 밀려 있었다. 늦게 배운 대금연주에 푹 빠져 있었기에.

집에서 잠자고 있는 어떤 악기를 선택할까 고민이 깊었다. 맛만 보았던 피아노와 기타에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무릎을 쳤다. 언젠가 가슴을 흔들어 댔던 우리나라 악기. 아련하고 애잔하여 한국인 정서에 맞는….

해금을 배울 수 있는 곳을 수소문하고 연습용 해금을 샀다. 해금은 <깽깽이>라고도 부른다. 중국을 통하여 고려 시대에 들어왔다. 중국의 <얼후>와 비슷하다. 작은 울림통에 세로로 대를 세우고 울림통과 대 사이에 두 개의 줄을 연결한다. 그 사이에 말총으로 만들어진 활대를 문질러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악보는 정간보(井間譜)다. 세종대왕이 동양 최초로 음의 시가를 표시할 수 있도록 한 과학적인 악보다. 초보자도 알기 쉽게 연주할 수 있게 되어있다.

여느 악기처럼 배우기에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를 사로잡았던 음은 나오지도 않고 불완전한 소리만 났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연습 시간을 기다렸다. 퇴근 후에 저녁을 급히 먹고 운전대를 잡았다. 활 쓰기와 자세도 자리 잡아가고, 쉬운 동요·가곡·유행가·민요 등에 흥미가 붙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는 차를 마시며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도 풀어냈다. 서툴렀지만 국악 단체에 가입하여 연주회도 몇 번 참가했다. 대금 공부하는 분들과 병원 로비에서 협연할 기회도 얻었다. 해금과 연을 맺은 지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덕분인지 공허감도 오지 않았고, 무대에 서면서 자신감도 퐁퐁 솟아났다.

장인이 만들었다는 해금을 새로 샀다. 나를 위한 은퇴 선물이다. 해금이 늘 놓여있는 자리는 거실이다. 양반다리로 앉아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왼쪽 무릎에 올려놓는다. 오래 앉기가 힘들어 의자로 옮겨 앉기도 한다. 아직도 제대로 음을 내기가 힘들다. 두 줄을 어느 위치에서 얼마만큼 누르거나 잡을지 늘 고민한다. 어떤 소리를 내어야 하나. 머리로는 알 것 같으나 제 음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현과 활의 마찰에서 얻어지는 음들이 실타래를 풀듯이 자연스러우면 원하는 음이 나왔다. 세상 사는 이치도 그렇지 않았던가. 삶에 힘을 더하거나 빼는 순간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수행하는 마음이 필요했다. 활을 빼고 미는 오묘함이 있어,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것이 인생임을 깨닫곤 한다.

직장생활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 쉼표를 찍었다. 요즘은 나의 의지대로 시간의 무늬를 짤 수 있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해금을 켜는 시간도 조금씩 길어진다. 욕심을 내려놓고 현을 타다 보면 고유의 목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쉼표가 있는 자리에 ‘소소하고도 확실한 행복’이 있음을 알 것 같다.

오늘도 나는 해금에게 말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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