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의 독자성 지닌 고대 독립국가 ‘탐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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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사 재조명 (1) 섬나라 탐라의 시작
탐라국의 발상지인 '삼성혈(모흥혈)'의 항공사진(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탐라국의 발상지인 '삼성혈(모흥혈)'의 항공사진(사진=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제공)

민선 8기 제주 도정의 문화공약인 역사문화 기반 구축사업은 제주 역사관 건립과 함께 제주 역사문화지구 조성을 골자로 하고 있다. 고대 해양 독립국 탐라사의 재정립은 이 사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일보는 탐라사 재조명을 통해 제주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제주의 미래가치 창출을 위한 제주역사 기반 구축사업의 주요 방향과 청사진을 5회에 걸쳐 들여다본다.[편집자주]

주호, 주호국, 탐라국, 탐라, 탐모라, 섭라, 탁라, 제주, 동영주.

삼국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오랫동안 불렸던 ‘제주’의 이름이다.

탐라는 3세기부터 12세기 초반까지 약 1000년 동안 고유의 독자성을 지닌 고대 독립국이었다. 5~10세기에 걸쳐 백제, 고구려, 신라 등 한반도의 고대국가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 일본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여나갔다. 그러나 1105년(고려 숙종 10) 고려 행정단위의 하나인 탐라군으로 편입되며 탐라 천년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지난해 마련한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 전시 모습.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이 지난해 마련한 '섬나라 탐라, 잃어버린 천년을 깨우다' 전시 모습.

▲무당의 입으로 불린 탐라의 건국

“‘탐라’는 영평 팔년 을축 삼월 십삼일 고양부 삼성이 모흥혈로 솟아나 도읍한 나라다”

현재 제주 무당의 말과 노래로 전해지는 굿의 서두에 해당하는 ‘날과국섬김(굿을 벌이는 시간과 공간)’의 제차 대목에서는 탐라 건국의 연대를 영평(永平) 8년인 기원후 65년으로 밝히고 있다.

민속학자 현용준이 1980년 펴낸 제주도무속자료사전에 따르면 제주시 용담동 안사인 큰심방이 구송(口誦)한 본풀이 가운데 ‘날과국섬김’ 제차에서 탐라 고·양·부 삼성이 모흥혈에서 솟아난 것은 ‘영평 8년 을축 3월 13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현재 전승되는 제주도 당굿 본풀이의 초감제 ‘날과국섬김’의 제차 대목에도 이어지고 있다.

현용준이 구술채록한 ‘광정당 본풀이’에서도 맏형은 광양당신, 둘째 형님은 정의현의 서낭당신, 셋째 동생은 대정현의 광정당신으로, 삼형제가 활을 쏘아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각각 차지할 곳을 정했다고 전한다.

‘송당본향당 본풀이’에서도 제주 땅에서 솟아난 토착세력인 남신과 섬 밖 외부세력 여신이 혼인을 통해 결합한다는 점, 토착 수렵신인 남신이 농경문화를 가지고 들어온 여신과 부부의 연을 맺은 후 수렵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한다는 점, 이후 남신이 고대국가인 탐라를 건국해 지배한다는 점 등 ‘탐라건국신화’와 유사한 신화소를 가지고 있다.

1794년 제주도에서 시행한 문무 시재 시험의 시행경위와 급제자 명단, 과문을 한데 모아 규장각에서 간행한 ‘탐라빈흥록’에는 책(策)에서 수석을 차지한 정의현 유학 부종인의 답안지가 실렸는데, 정조가 삼성혈 등의 자취가 전하는 이유 등에 대해 묻자, 부종인은 삼신인이 모흥혈에서 용출한 때는 ‘한나라 명제 영평 8년인 65년의 일’이라 답하고 있다.

한학자인 심재 김석익이 1918년 편찬한 역사서 ‘탐라기년’은 약 1000년에 달하는 제주의 주요 역사를 한 권에 담아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해당 책 외서(外書)에는 탐라역사에 대해 정리해놓고 있으며, 탐라국 시조 삼성의 출현을 ‘한나라 명제 영평 8년인 65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의 ‘탐라현’조에는 탐라건국의 내용을 시작으로 결혼, 정착생활 등 삼형제의 신라입조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고려사의 ‘탐라현’조에는 탐라건국의 내용을 시작으로 결혼, 정착생활 등 삼형제의 신라입조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국립중앙도서관 소장)

▲탐라건국신화, 문자화되다

탐라건국신화는 제주 무당들의 입을 통해 본풀이로 불리다 이후 문자 형태로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문선’, ‘영주지’, ‘탐라지’, ‘남환박물’ 등 각종 역사서에 기록됐다.

김종서 등이 1449년~1451년에 걸쳐 펴낸 ‘고려사’의 ‘탐라현’조에는 탐라건국의 내용을 시작으로 삼신인과 삼공주의 결혼, 정착생활, 농경사회의 형성, 고을나의 15세손 고후, 고청과 그 아우 등 삼 형제의 신라입조 등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478년 당시 예문관대제학 서거정이 홍문관대제학 양성지 등과 함께 삼국시대 후기에서 고려시대,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인, 문사들의 시문 가운데 우수한 것을 모아 편찬한 시문집 ‘동문선’에는 탐라건국신화를 담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인 1416년 대제학 정이오가 지은 ‘성주고씨가전’의 내용이 실려 있다.

1530년 이행 등이 편찬한 관찬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서도 탐라건국신화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전라도에 속한 제주는 권38 ‘제주목’에 수록됐으며, 해당 책 ‘건치연혁’에는 ‘고려사’와 유사한 내용으로 탐라건국신화가 기술돼 있다.

탐라지의 제주목 ‘고적’조에는 고려사와 유사한 내용의 탐라건국신화가 기술돼 있다.(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탐라지의 제주목 ‘고적’조에는 고려사와 유사한 내용의 탐라건국신화가 기술돼 있다.(제주특별자치도 세계유산본부)

제주목사 이원진이 목사 재임 당시 제주도 관련 자료를 모아 1653년 편찬한 제주도 최초의 사찬읍지인 ‘탐라지’에는 제주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으로 나눠 연혁, 관원, 풍속, 토산, 인물 등 17세기 제주와 관련한 상세한 내용이 담겼다. 해당 책 ‘제주목’의 ‘고적’조에는 ‘고려사’와 유사한 탐라건국신화가 기술돼 있다.

남환박물 ‘지고’조에서는 삼성혈을 주성 남쪽 3리 거리에 있다. 이곳이 예전 모흥혈이라 불리던 곳이라고 시작하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남환박물 ‘지고’조에서는 삼성혈을 주성 남쪽 3리 거리에 있다. 이곳이 예전 모흥혈이라 불리던 곳이라고 시작하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를 지낸 병와 이형상이 1704년 저술한 제주 박물지 ‘남환박물’의 ‘지적’조와 ‘지고’조에는 탐라건국 연혁과 삼성혈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형상이 편찬한 ‘탐라순력도’가 제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라면, ‘남환박물’은 제주의 자연, 역사, 산물, 풍속 등 제주민의 다양한 삶과 습속을 방대하게 기록했다.

우암집 권1 ‘모흥혈고사’ 제목의 시에는 탐라의 건국 연혁을 시로 읊고 있으며, 내용 중 ‘(탐라건국의) 커다란 행적이 무당굿에 드러났다’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우암집 권1 ‘모흥혈고사’ 제목의 시에는 탐라의 건국 연혁을 시로 읊고 있으며, 내용 중 ‘(탐라건국의) 커다란 행적이 무당굿에 드러났다’라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탐라건국 연혁을 기록한 제주판관 남구명의 개인 문집 ‘우암집’에서도 ‘모흥혈고사’ 제목의 시에는 ‘(탐라건국의) 커다란 행적이 무당굿에 드러났다’는 소회를 밝히고 있다.

강소전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는 “탐라건국신화가 형성되고 이를 전승할 수 있었던 근원적인 배경은 제주에 ‘본풀이’라는 서사무가 전통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며 “‘고려사’의 기록처럼 탐라건국신화가 온전히 구송되는 구비전승은 오늘날 찾을 수 없기는 하다. 그러나 탐라건국신화와 여러 당신본풀이들이 함께 이루어낸 변주는 모두 옛 탐라와 제주의 구비역사를 증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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