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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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숙 수필가

문방구에 들렀다. 나는 이곳을 드나들 때마다 어디서 생기는지 에너지가 생성된다. 구석구석 다 돌아보고 나서야 필요한 것을 사고 나온다. 어떤 날은 특별히 살 것도 없으면서 이것저것 구경을 한 후에, 달랑 볼펜 한 자루를 사서 나오기도 한다. 오늘은 무슨 마음이 들었던 걸까. 캔버스와 수채화 물감, 팔레트를 사고 나왔다.

초등학교 적, 교실 뒷면에는 반 아이들이 그려 놓은 솜씨 자랑 코너가 있었다. 마음껏 그려보고 싶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딱 한 번, 운동장 철봉에서 재미있게 놀고 있는 다양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나의 그림이 그곳에 붙여진 적이 있다. 얻어 그린 도화지의 크기는 다른 그림의 반 정도였다. 더없이 초라한 나의 그림이지만 그 기억 하나가 ‘그림을 그려볼 거야.’라는 간절함을 늘 간직하고 살게 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오빠는 육 학년이었다. 나와 오빠 사이에 언니 둘도 초등학생이었다. 줄줄이 식구대로 구색을 갖춰 학용품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미술 시간 준비물을 마련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시간표에 미술 시간이 들어 있으면 걱정이 앞섰다. 준비물을 갖추고 학교에 가는 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에게 도화지 한 장, 크레파스를 빌려다 쓰곤 했다.

준비물이 부실한 나는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남아도는 몇 가지 색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이 짙은 황토색이 되기도 하고, 하늘을 하늘색으로 칠하지 못했다. 죄다 남아있는 색상들은 짙은 색상들이었다.

아들들이 어릴 때, 교회학교에서는 분기마다 달란트 시장이 열렸다. 출석과 암송, 전도를 하면서 한 장 두 장 애써 모아놓은 달란트로 살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달란트 시장이 열리는 날이면, 정작 아이들은 별 감흥이 없는데 내가 더 신이 났다. 달란트로 사 온 문구용품들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 방과 거실에 내팽개쳐진다. 하나둘 거둬 내 책상 위로 갖다 놓았다. 모두 내 것이 되었다.

내 필통은 문구용품으로 가득 차 있다. 형형색색의 볼펜, 지우개, 골무, 클립, usb, 웬만한 가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어느 날, 공중화장실에서 벽에 걸려있는 휴지 케이스 위에 필통을 얹어놓은 걸 깜박하고 하룻밤이 지났다. 아침에 필통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제자리에 얌전히 있는 필통을 만나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부터 필통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큰 가방을 들고 다녔다. 한동안 필통에 가위, 커터 칼도 넣고 다니다가, 공항 보안검색대에서 몇 번을 걸리고 나서야 돌아가 위험물로 맡기는 것이 번거로워 이제는 빼고 다닌다.

스케치북을 펼치고 연필로 스케치하고 과감하게 혼자 그려볼 만도 하지만 선뜻 시작을 잘하지 못한다. 스케치북이 버려질까 아까운 마음 반, 실력도 없으면서 처음부터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감 반이다.

하얀 캔버스를 깊은 바다색으로 칠해 놓았다. 붓에다 듬뿍 물감을 적시고 쓱-쓱- 바르는 느낌이 좋다. 코끝에 닿는 물감 특유의 냄새가 웬일인지 나에게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이제 이 캔버스에 무엇을 쓰고 그릴지 고민하는 중이다.

깊은 바다에 ‘고래 한 마리 그려 넣을까. 아니야,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처럼 별을 그릴까. 밤하늘이 어울리겠어.’ 캔버스가 바다가 될지 하늘이 될지 갈등하는 중에도 설렘으로 가득하다.

과거의 결핍을 메꾸고 싶은 욕망이 나를 다시 끌어들인다.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꿈꾸는 바다, 밤하늘이 나를 꿈꾸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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