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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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심 수필가

왜, 여기서 발길이 멈추었을까. 수십 번 오가던 길인데, 나를 붙든 건 도대체 무엇일까. 바람 부는 들판에 길목을 지키며 작은 팻말 하나가 서 있다. 내용은 거의 알아볼 수 없지만, 이 지역에서 일어난 어떤 ‘난’에 대한 알림판이다. 코끝에 닿는 서늘함, 흙에서 전해지는 청량감, 풀과 나무들의 의지처가 되어주는 낮은 오름. 억새꽃 물결은 산과 들에 가득 일렁이고, 회오리 같은 바람이 한차례 벌판을 휩쓸자 어디선가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몰려오는 듯하다.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시간을 한참 거슬러 1374년, 이 터에는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제주도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 고려에 환속되었으나 말을 기르던 몽골사람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목호’라는 이들은 막강한 부와 세력을 행사하며 제주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몽골제국인 원의 세력이 약해지자, 고려조정은 명나라와 친교를 맺고 목호들에게 말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목호들은 적국인 명나라에 말을 보낼 수 없다며 반기를 들었다.

가을 햇볕에 한라산의 억새가 눈부시다. 하얗게 피어난 억새꽃은 산허리를 장식하며 장관을 이룬다. 뿌리가 억세어 잘 뽑히지도 않고, 날 선 잎은 손이 닿기만 해도 피가 주르륵 흐르는, 베어내어도 금방 자라 무덤을 점령해 버리는, 내게 억새는 애물단지로만 남아있는데…. 여름내 짙어진 잎과 쭉쭉 뻗은 줄기는 어떤 바람도 가를 기세다.

고려 조정은 장수 최영에게 2만 5천 명이 넘는 대규모 정예군을 보내 목호들을 토벌하도록 했다. 섬에 살던 인구와 맞먹는 군대가 들어와 목호들을 진압한다면서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온 섬은 피바다가 되고 살육장이 되었다. 고려군은 몽?0골인의 피가 섞인 가족들은 물론 조금이라도 몽골인과 연루된 사람들은 모조리 찾아내어 그 자리에서 몰살 하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멘다.”

고려는 제주 사람을 고려의 백성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미 저들은 한통속, 아닌 자를 구분하기 힘들다’며 몽골 사람이 아닌 제주인 까지 토벌 대상으로 삼아 무참하게 전투를 벌였다. 외지 세력인 몽골과 고려군에 의해 초토화 되어버린 섬에는 시체 썩는 냄새로 천지가 진동했다. 섬의 인구 절반이나 사라졌다. 제주사람들에게는 고려 조정이나 원나라, 명나라 모두 자신들의 이득만을 내세워 섬을 지배하려는 외세일 뿐이었다. 시시때때로 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섬을 뒤흔들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섬사람들은 폭풍 속으로 내몰렸다. 자신들의 의도나 이해와는 상관없이 이리 저리 밀리면서 혹독한 삶을 살아내야만 했다.

억새가 춤을 춘다. 바람이 불면 드러눕고 바람 자면 일어나 물결처럼 일렁인다.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쉬이 파헤칠 수 없는 덩이가 된 억새. 들불을 놓아 모두 태워버려도 이듬해면 다시 퍼렇게 돋아나는 끈질긴 생명력.

한라산이 가까이 보일 만큼 사방이 탁 트인 널찍한 들판.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 땅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니. ‘목호의 난 발발지’라고 적혀있는 작은 팻말이 나를 붙든 건, 무심히 지천으로 피어나 자생하는 억새들의 함성이었을까. 이 산야를 떠돌며 하마 잊힐까 노심초사 토해내는 원혼들의 통곡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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