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시작, 그 탐색(1) 골목에서 고샅으로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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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집 어귀에 어떻게 다가갔을까. 잠의 늪에서 빠져나와 댓 살쯤, 여섯 살 손위 누이 등에 업혔을 것이다. 팽나무 아래는 뜨거운 여름 볕에도 늘 바람이 설렁설렁 서늘했다. 무더위에 그늘처럼 좋은 세상은 없을 것 같았다.

누이가 업고 그늘에서 땀을 들이던 아이가 더우면 시원한 그늘을 찾느라, 해만 뜨면 툇마루에 내려 누이에게 나가자 보챘을 것이다.

이 짐작은 예닐곱 살이 되면서 분명해졌다, 긴긴 여름날의 적막을 더욱 돋우던 매미의 떼창에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아도, 바람 살랑이는 그 곳 그늘은 딴 세상이었다. 그러면서 모르는 사이 내 눈길이 골목길을 향하게 됐다. 밖으로 한 발짝 내디디면 어떤 길이 열릴까. 호기심에 설레던 나는 늘 집을 떠나는 꿈을 꿨다.

처음엔 골목 아이와 함께였다. 나는 골목의 마지막 지점에 앉아 고샅을 훑어보고 있었다. 늙은 팽나무 아래 거적을 깔고 어른들이 모여 수군수군 무슨 말들을 주고받으며, 모두들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웬 좋은 일일까.

다음날, 지척에 우물이 있는 걸 처음 보았다. 아주머니 한 분이 등에 물허벅을 지고 나왔다. 그건 어머니가 물을 길어 오는 걸 봐 낯익었다.

뜻 밖이다. 이랴, 밭에서 돌아오는 노인 한 분이 마차에 걸터앉아 말 엉덩이에 채찍질을 하자, 말이 훔칫 빠른 걸음을 내디딘다. 바쁜가 보다. 그다음날, 길 건너 동산에 올랐다 놀라 ¾-밭에 주저앉았다. 푸른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있지 않은가. 하얀 거품을 물고 끊임없이 밀려와 새카만 바위에 부서져 내리는 파도가 신비했다.

누이가 골목 밖으로 이탈한 나를 못 찾아 동네 구석구석을 뒤졌을 것이다. 삘기를 한 움큼 뽑아 들고 누이를 부르는 날 품 가득 안아 주던 누나. 되게 욕을 하려다 날 찾아 기뻐선지 불그레한 얼굴로 환히 웃었다. 그 밝은 얼굴, 지금 여든여덞 상노인이 됐는데도 그때의 고운 얼굴로 덮씌워 온다.

고샅 풍경에 홀린 나는 한때 누이의 감시에 갇혀 골목 안으로 출입 통제됐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자치기와 구슬치기는 아이 두, 셋이면 됐다. 치고 맞히며 명중의 환희를 체험했고, 딱 맞아 떨어지던 기적을 즐기며 우연과 필연의 경계에서 희열을 훔치기도 했다. 힘으로든 꾀로든 이젠 되지 않는다.

초등학생인 내게 경이적으로 다가온 사물은 학교 앞으로 난 신작로와 그 위를 달리던 차였다. 흙을 파헤쳐 자갈을 깔고 그 위에 흙을 덧씌운 신작로. 그 위를 터덜터덜 달리는 주둥이 길게 나왔던 버스와 트럭과 천으로 뒤덮던 지프차. 창가에 앉아 오가는 자동차 구경에 신이 났었다.

저 차들을 타기만 하면, 제주읍에 간다 했다. 여기는 시골, 그곳은 도시라는데, 여기는 초가집 천지지만 그곳은 기와집 천지라는데, 길도 넓고 학교도 크다는데, 그곳엔 극장도 있고 빵집도 많다는데….

집 어귀 팽나무에서 골목으로 한 걸음씩 고샅으로 나아간 그 걸음이 학교로, 신작로로, 상상의 세계 제주읍으로. 길의 시작은 어느새 길의 탐색으로 이어지면서, 사회화해 어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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