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가 사들고 온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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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재수하는 손주가 우리하고 15분 거리에 산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아이다. 혼자 챙겨 먹는 게 얼마나 힘들까 싶어. 밥이 넘어가지 않을 때는 왜 없으랴. 체력이 떨어질세라 간간이 불러 영양 보충을 해주곤 한다. 먹성이 나를 빼닮아서인지, 특히 육식을 좋아한다. 배불리 먹는데도 배가 나오지 않아 나를 ‘도둑배’라 하던 젊은 시절이 생각난다. 녀석이 와 맛있게 먹는 걸 옆에서 보기만 해도 배가 동산만큼 불러온다. 그게 혈육인가.

오늘은 아내가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과 콧바람이나 쐬자며 만나기로 약속한 날이다. 제 할머니가 집에 없는데 혹여 집에 오면 대접(?)할 손이 없어 녀석이 공치게 된다.

수능시험이 딱 엿새 남았다. 집에 왔다 간 지 열흘이라 대충 짐작이 간다. 녀석이 허기져 시험 치기 전 마지막으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밖으로 나가는 할멈에게 전화하도록 해 놓았다. ‘오늘은 내가 집에 없게 되니 오지 말고 내일모레쯤 왔다 가렴.’ 시험 준비하느라 시간을 쪼개는 애가 헛걸음하는 일이 있어선 안되겠기에 신경을 쓰노라 한 것이다.

수능 몇 점 차이로 합불이 갈린다. 지난 일 년,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야무지게 책상 곁을 지켜온 아이다. 조부모가 되고서 어머니 빈자리를 채워주는 건 당연한 도리이고 의무라 여겨 보듬어 오는 터다. 재수 일 년, 아득한 것 같던 날들이 언제 지나 남은 날이 고작 대엿새인가.

지나온 일 년으로 치면 남은 날은 한 찰나 아닌가. 가슴 팍팍해 오며 나도 숨이 가쁜데, 손주 녀석 얼마나 초조할까.

‘내일랑 집에 오라 해야지. 그러고서 남은 며칠 동안 혼자 숨을 고르면 좋을 것 같아.’ 늦가을 하늘이 개고 좋은 햇볕이 낭창낭창 내려앉는 베란다에 앉았는데, 불쑥 무얼 든 손이 눈앞을 스친다. 손주 녀석 손이다. 깜짝 놀랐다. 테이크아웃 커피와 보자기에 싼 음식.

“커피는 저랑 같이 마시고, 이건 할아버지 점심이에요. 전 조금 전에 집에서 먹었어요.” 할머니 전화를 받고 나 혼자 집에 있는 걸 알고 ‘기회’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웃으면서 아이를 빤히 쳐다보다 울컥하는데, 녀석은 하려던 일을 해냈다는 듯이 의기양양해 빙그레 웃고 있다.

“지용아, 고맙구나. 한데 내일모레 시험인데 시간 축내가며 내 점심까지 챙기니? 나도 조금 전에 대충 때웠거든. 놔뒀다 저녁에 먹으마. 아무튼 고맙구나. 맛있게 먹을게.”

‘살다 보니’란 말을 한다.

살다 보니 스무 살 손주가 사고 온 밥을 다 먹는구나. 그것도 수능을 며칠 앞둔 녀석이 호주머니 털어가며 사 온 밥. 언제 이렇게 컸나, 언제 이렇게 셈이 꽉 찬 걸까. 입이 다물리지 않는다. 어쩌다 할머니가 집을 비운 틈에 내 점심을 사 들고 왔으니…. 아이를 꼬옥 안아주었다. 녀석 밝게 웃으면서 일어선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인가. 나가는 녀석의 등을 다독이며 말을 건넸다. “실전은 연습처럼!”

아이가 들고 온 것은 돈까스였다. 시간이 많이 지나 눅었지만, 이 세상에 이런 음식이 어디 있으랴. 녀석도 참, 앞으로 녀석 생각하면 돈까스가 떠오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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