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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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명숙 수필가

폭우가 쏟아지던 가을, 안덕 산방도서관을 찾았다. 독서의 달을 맞아 문태준 시인 초청 ‘생명 세계와 나의 시’ 주제로 강연회가 있었다.

시인의 대학시절 선후배와 합평회가 있던 날, 본인의 시를 발표했더니 선배가 그 자리에서 시를 불태워 버렸다 한다. 그 일을 계기로 그해 여름방학에 고향에 가면서 시집 70권을 구입했다. 낮에는 부모님 농사일을 돕고 사나흘씩 밤을 새우며 오로지 시집만을 읽었단다. ‘책’은 자아가 자유롭게 유영하며 확장해 가는 우주라고 했던가. 독서에 대한 강의를 듣고 보니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십여 년 전, 둘째 딸의 결혼식을 마치고 사돈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 제주공항에서 일이다. 기상악화로 가족들은 항공편을 구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인파는 붐비고 소음으로 가득했다. 안사돈은 공항건물 기둥 옆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이다. 나는 주변 환경이 조용해야 책에 집중이 되는데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가 보다. 훗날 딸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시어머니는 낯선 곳에 와서 자신이 해결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낸 것 같다고 하였다.

나는 왜 독서를 해야 하는가.

작년에 둘째딸이 있는 뉴질랜드를 방문할 일이 있었다. 하루는 딸과 태어난 지 두 달된 손녀와 오클랜드시에 있는 식물원으로 걸음을 했다. 잔디밭의 풀냄새가 코끝에 스치자, 어린 시절 아버지와 온가족이 촐 베던 날의 냄새처럼 푸근했다.

식물원내에 있는 까페에 들어섰다. 아침시간이라 비교적 한산해서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유모차에 있는 아가에게 관심이 향했고 한참 후에야 실내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이때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는 반백의 할머니와 눈길이 마주쳤다. 연세는 가늠할 수 없으나 어림잡아 팔십대로 보였다. 혼자서 책을 보다가 나와 눈빛이 닿자 하얀 순백의 동백꽃 같은 미소를 보내왔다. 그 시간이 아침 아홉시 경이었으니 우리보다는 한 시간은 먼저 걸음 했지 싶다.

이른 아침에 느긋하게 독서하는 할머니가 강물이라면, 나는 강바닥이리라. 강바닥에서 뜨거운 전율이 일어났다. 영어를 할 줄 알았다면 인사라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은 시간이 흐른 후 그녀가 자리를 떠난 후였다.

철학자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 없는 몸과 같다’고 했다. 그래서 책은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일이라 하는가보다. 언젠가 백세 인생의 시계태엽을 어떻게 감을 것인가 나름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의 버킷리스트여서일까. 온기있는 외국 할머니가 독서하는 광경은 신선하고 경이롭다. 내가 그려왔던 미래의 그림을 목격하다니. 마음이 흐려질 때 낯선 땅에서 책 읽던 눈부처인 할머니를 기억하리라.

독서란, 마음의 꽃에 물을 주는 일이다. 몰입과 상상력이 자신을 풍요롭게 하기에.

강의에 스며들다보니, 창밖에는 비가 그치고 저녁노을이 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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