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 세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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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희 수필가

주방 선반에 연황록의 모과 세 개가 오종종히 앉아 있다. 길둥그런 모양이 투박하고 정겹다. 그윽한 향내에 취해 “흐음~” 눈이 감긴다. 향기는 초롱이 되어 남녘의 한 기와집으로 안내한다.

“아이구~ 다른 것은 갠찮은디 참기름이랑 들기름이 아깝네요. 토종깨로 인자 막 짠 것인디···.

말끝을 맺지 못하는 어르신의 목소리는 애간장을 녹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초조한 마음에 나도 수시로 대문을 열어본다. 안절부절 못하며 택배박스가 있나 확인하고 핸드폰의 문자를 체크한다. 물품의 송장번호와 배달상황도 확인한다. 도착 예정일보다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어 전화를 했다. 광주를 떠난 화물차가 전복되고, 싣고 있던 물품이 거의 파손되어 사고를 수습 중이라 했다. 안타까워하는 그분이 딱해서 내 마음도 타들어 갔다.

”아깝긴 해도 벨 수 없지요.”

기운이 쏙 빠져나간 목소리였다. 잘 먹은 걸로 생각할 테니 애달파하지 말라는 말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택배상자가 왔다. 박스는 테이프로 몇 번이고 꽁꽁 둘러쳐지고도 볼록하니 배를 내밀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뚜껑을 여니 멸치젓 황석어젓의 감칠맛 나는 풍미가 벌써부터 입맛을 돋웠다. 입구를 얇은 끈으로 묶은 배추김치 총각김치 파김치 봉지들이 복주머니처럼 두두룩했다. 서리태와 청국장 봉지 사이로 기름병 두 개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신문지로 둘둘 말고 뽀글뽀글한 뽁뽁이로 다시 한 번 둘러있다. 박스와 기름병 사이 빈 공간을 통실한 모과 세 개가 탄탄히 받치고 있었다. 일찍부터 잊고 살았던, 살갑고 애틋한 모정 같은 것이 훅 하고 밀려들었다.

그분은 내 올케의 친정어머니다. 나와는 어렵다는 사돈지간인 셈이다. 오래전 그분 댁에 초대를 받았다. 감나무 꼭대기쯤에는 까치가 홍시를 쪼고 있고 모과나무 가지에는 둥글둥글 매달린 모과가 인상적이었다. 담장 밑의 두루뭉술한 항아리들까지 내 유년의 뜨락을 떠올리며 그 집이 낯설지 않았다. 향토색 짙은 별미들도 익숙한 맛이었다. 융숭한 대접을 받고 나오는데 미리 따놓았던지 황금색 모과를 한아름 안겨 주었다. 흐벅지게 쏟아지던 모과의 향기, 내 오감을 강타했던 그 농익은 내음은 참으로 특별했다. 그 후 친정엄마가 없는 내가 안됐다며 거의 딸처럼 여기신다. 소소한 집안일까지 마음으로 함께 해주신다.

마당에서 딴 달보드레한 봄 살구부터 한 해를 시작하여 갖가지 제철김치에 겨울 김장김치까지 줄줄이 보낸다. 틈틈이 김부각이며 콩과 땅콩, 별사탕까지 넣은 쌀강정으로 아이들 간식까지 챙겨준다. 그렇게 수없이 택배물품이 오던 중 이번에는 배달사고가 난 것이다. 한 번도 황송한데 다시 장만해 보내주니. 송구한 마음에 몸 둘 바를 몰라 전화를 드렸다.

“인자 받었으믄 댔어요. 모과도 멪 개 넜응게 모과청 맨들어 드쇼 잉~. 생긴 것은 그래도 냄새는 좋아요.”

한결 밝아진 목소리가 다감했다. 며칠 뒤 전해 들었다. 모과를 따다가 발을 삐끗해서 발목에 깁스를 했다고. 다 따고 몇 개 안 남은 모과는 우듬지쯤에 있었을 터, 작은 키에 허리까지 구부정한 그분께는 힘에 부쳤을 것이다. 게다가 처음보다 더 묵신헌 놈으로 따야 한다며 사다리까지 동원해 무리를 한 모양이다.

다정하게 기대고 앉아 있는 모과를 보니, 내 안에는 하르르 모과 꽃이 피어난다. 오는 겨울은 모과가 전하는 향내만으로도 푸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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