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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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숙 수필가

샤스타데이지가 이제 막 꽃봉오리를 열기 시작했다. 요즘은 길가 화단에도 같은 종류의 꽃을 한꺼번에 심지 않고, 색의 대비를 염두에 두어 파종하는 모양이다. 하나, 둘, 셋, 넷…. 바람에 흔들리는 초록의 사초들 틈에, 드문드문 핀 꽃송이가 마치 점멸하는 경고 신호등 같다.

이태 전 겨울, 사거리 신호등 기둥에 기대어있던 하얀 꽃다발이 문득 눈에 밟혀온다. 한파 날씨에 검은 리본을 두른 채, 오랜 시간 누군가의 넋을 달래고 있었다. 여기 어디쯤에서 방향을 잃었던 걸까. 사고를 당한 사람은 사는 일에 치여 잠시 자기 자신을 잊었던 걸까.

주인 잃은 헬멧과 신발들이 자주 길바닥에 나뒹구는 길목이었다. 나는 차를 몰고 매일 그곳을 지나쳐 갔다. 무심한 척 차창으로 보이는 그 꽃을 눈으로 확인하고 바로 집으로 되돌아왔다. 자꾸 꽃의 근황이 궁금해서였다. 꽃은 바람 부는 날에도, 싸락눈이 세차게 뿌려지는 날에도 늘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그곳에서 새로 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바람에 쓰러지면 누군가에 의해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하며, 여러 날 동안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고 있었다.

꽃을 보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특별한 색으로, 때로는 짧은 영상으로 과거의 일이 소환되기도 한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초가집을 소개하는 TV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다. 구순이 넘은 할머니는 집의 역사와 그 집에 얽힌 이야기를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일처럼 이어가는 중이었다.

“난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수다, 저 꽃으로나 피었으면 조으쿠다.”

할머니는 마당에 핀 꽃을 가리키며, ‘꽃은 졌다가도 같은 뿌리에서 피어나면 다시 살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면서 할머니의 말이 생경했다. ‘모든 삶은 각자 삶의 방식이 다 다를 텐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할머니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생명은 몸을 바꿔서도 다시 이어간다는 자연의 섭리를 몸소 체험한 나였지 않은가.

“잘 살아야 돼.”

퇴원하고 귀가하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이 한 말이었다. 내가 수술하는 동안, 장기이식센터 수술 방 앞에, 하얀 국화꽃 다발이 놓여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면서 한 말이다. 어린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같은 수술실 앞에서 보호자의 입장이 되어 기다리고 있을 때 짐작할 수 있었으리라. 학교 부근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모양인지, 부모의 손에는 아직도 주인 잃은 물건이 검은 봉지에 담긴 채 들려있었다고 했다.

벌써 십여 년이나 훌쩍 흘렀는데도, 그때를 떠올리면 문 앞의 모습들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생생히 그려지곤 한다. 수술 방문 앞에 놓여있던 하얀 꽃다발의 모습도…. 공항에서 했던 약속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고, 벌써 길을 잃고 비틀거리는 내 모습이라니. 내가 이렇게라도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가능한일이 아닌가. 쓰러지면 다시 세워주고 바람이 불면 의지가 되어주는 이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하얀 꽃다발은 남겨진 이의 간절한 바람이었던 걸까. 꽃을 통해 생명을 다시 얻기를 바라는 마음,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의 표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둠 속에 빛나는 등대처럼 길가의 꽃들이 반짝인다. 어느새 내 발길이 꽃을 따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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