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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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김길웅.

스물한 번째로 작품집을 냈다. 첫 삽을 뜬 게 2월 초, 오늘 보내는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 일에 매달려 근 일곱 달 만에 끝난 셈이다. 한두 번 하는 것도 아닌데 감회가 별나다. 심신이 고단하거니와 거둬들인 뒷그루를 돌아보는 농부처럼 헛헛한 심사를 가누지 못한다. 이삭줍기다 싶어 얼른 낙수(落穗)란 말을 떠올렸다 지우고 ‘책 설거지’란 말로 바꿨다. 생각을 바꾸니 자연 말도 달라지는 건 정한 이치, 밥 먹고 치다꺼리하는 격이지만, 사실적이라 실감이 난다.

등단 30년을 회고하고 내 문학의 자취를 톺아보면서 시·수필 근작을 모아 작품집을 곁들이려 했다. 두 장르를 묶어 통권으로 내자 한 것. 구상대로 하다 보니 그민 책의 볼륨이 상식의 틀을 벗어났다. 파격이다. 이렇게 탄생한 《여든두 번째 계단에 서다》는 624쪽, 몸집 큰 물건이 돼 버렸다.

이미 가래나무에 글을 올렸으니, 이를 어쩌랴. 내 일로, 자업자득인데 누굴 탓하랴. 키 큰 놈 소갈머리 없다고, 알맹이는 없고 큰 허우대에 쭉정이만 담은 건 아닌지 여간 속 끓이지 않는다.

책의 품격이야 저자의 문학 역량이 해내는 것이니 다소간 애태우다 말겠지만, 책 발간 뒤의 설거지가 만만치 않다. 책의 무게를 달아보지 않았지만 한 손에 들기가 거북할 정도다. 쪽수가 한도를 벗어난 것도 그렇지만, 하드커버한 것도 책을 상당히 무겁게 했을 것이다. 책은 원래 무겁다. 이사할 때 짐은 책의 무게라 함은 경험칙이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택배 기사는 현관에서 한 걸음도 더 옮겨주지 않았다. 거실 안을 요구하다 관뒀다. 불더위에 뻘뻘 땀 흘리는 이에게 내 입장만 내세울 수 없었다. 책과의 싸움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봉투 작업을 할 수 있게 간신히 거실 가운데로 밀어놓았다. 무려 스무 박스. 책을 받을 사람 주소를 써서 봉투를 쌓는다. 박스를 뜯어 책을 꺼내 책상 위로 옮겨서 봉투의 사람과 일치하게 ‘000님께, 2023.8. 저자 드림’이라 일일이 육필한다. 처음으로 저자 이름 석 자를 생략했다. 예도가 아니란 생각에 망설이다 마음을 굳혔다. 책을 드리고 있으니 이해하란 억지다. 400인쯤 쓰는데 ‘석 자’면 합이 얼만가. 포병객 신세에다 나이 좀 들었다고 웬만한 엄살(?)이 아니다.

우송하고 인편으로 보내고 직접 건네고…. 책이 100여 권을 남겨놓고 모두 내 곁을 떠나갔다. 의당 갈 길이라고 저벅저벅 서슴지 않은 행보들이다. 떠나는 내내 책의 뒷모습을 따르던 눈을 거뒀더니. 갑자기 ‘후후이’ 긴 한숨이 나온다. 다 떠나보낸 이마적에 웬 한숨인가.

거실이며 책상 주변이 어수선하다. 빈 책상자, 끈, 커터날, 책봉투, 스카치테이프, 딱풀, 메모지…. 여기저기 흩어진 것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다. 이제 책 설거지가 끝났다. 남은 책들만 다용도실로 가져다 보관하면 된다. 갈 곳을 찾지 못했지만, 하나 둘 얼마없어 책은 읽을 사람을 만날 것이다.

《여든두 번째 계단에 서다》, 어쩌다 여든둘의 나이를 꺼냈을까. 행여 다신 책을 내지 못할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던 건 아닐까. 그건 나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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