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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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음식이 돼 준 생명들도 하늘의 일부인 만큼 음식을 먹는 것은 곧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 것이다. 하늘인 내가 다른 하늘을 먹어 생명을 얻는 것 그리고 그 귀한 생명을 온전히 지니는 힘, 밥. 이를 일러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이다.”고 했다.

모를 일이다. 하늘도 어느 한 시절을 가난에 쪼들리는지, 내가 어렸을 적엔 하늘인 밥이 지독히 조악(粗惡)했다. 하늘답지 않았기에 하는 얘기다. 풀기라곤 없어 모래알처럼 숟가락에서 사륵사륵 흘러내리던 조밥, 고구마에 눈 밝은 닭 주워 먹음직하게 노란 좁쌀을 섞던 고구마밥, 피밥, 톳밥…. 산도쌀로 지은 곤밥(쌀밥)은 제사 명절날에나 몇 술 떠넣던 그림의 떡이었다.

아, 내 생일에 서숙밥을 하면서 한 귀퉁이에 산도쌀 한 줌 섞어 우리 어머니 밭에 가며, “오늘이 네 생일이구나. 잔뜩 먹고 학교에 갔다 오너라.”시던 양은 대접 속에서 김 모락모락 나던 특별한 밥 반지기. 희뜩희뜩 눈에 들어와 박히며 반짝이던 산도쌀의 그 하얀 낯섦.

알량미란 게 있었다. 장만하며 무얼로 알알이 눌러놓은 듯 납죽납죽한 낱알이 신기했지만, 까끌까끌 도무지 거칠던 밥알, 커서 알고 보니 알량은 월남(안남의 한자 차자), 그러니까 베트남에서 수입해 온 쌀이었던 걸 알아냈다. 지구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머리 위에 한 하늘을 이고 살며 하늘 같은 쌀을 생산한 것이니, 우리 밭에서 나는 산도쌀이나 산 넘고 바다 건너온 알량미나 그게 그것으로 다 고귀한즉 곧, 하늘이요 생명이라 여겼지만.

못 살아 구차해도 언제나 하늘은 하늘로 푸르렀다. 하늘을 나무라다니, 꽁보리밥도 엄연한 밥이었다. 밥으로 있어 밥이었다. 다섯 식구가 찬거리 없이도 조밥 보리밥에 된장국을 받아 앉은 늦은 저녁 밥상에서 나는 하늘을 먹으며 지고 지존한 하늘에게 사람 행실의 근본인 겸손을 배웠다.

보잘것없는 먹거리를 먹는데도 어른은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밥 먹으며 숟가락 소리를 내지 마라.” 타이르거나 지나는 말이 아닌, 마른하늘에 벼락 같은 불호령이었다.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이냐, 밥을 먹는 자리 아니냐. 눈치 없이 하늘을 먹으며 허튼짓 섣불리 하지 말고 삼가라 함이었다.

없어 넉넉지 않아 느긋하진 못했지만, 갖지 못해 가진 자를 부러워하거나 나는 가진 게 없다고 투덜거리진 않았던 것 같다. 배고파 허기져도 똑같이 우러러 하늘을 밥으로 먹었기 때문에, 빈부와 소유의 많고 적음은 실로 하잘것없는 것이므로.

지금까지 살면서, 내가 못 가졌다고 남에게 깡통 들고 걸식해 본 적 없었다. 자르르 기름기 흐르는 밥은 아닐망정 하늘이 내린 밥을 먹으며 컸지 않은가. 하늘은 때로 무심하고 매정한 것 같아도 한없이 공평하고 공정하다. 한쪽으로 쏠리거나 치우침이 없다. 그게 하늘이다, 삼시 세끼 먹는 밥이다. 하늘 같은 밥이다.

요즘 아내가 짓는 밥이 별스럽다. 백미, 현미, 보리쌀, 팥, 기장으로 오곡밥이다. 어째 꽤나 요란스러운 것 같다. 건강을 따지는 셈법인 걸 모르지 않으나. 글쎄 너무 나가는 건 아닌지. 어차피 밥은 밥으로 하늘인데, 또 달리 어떤 하늘이 있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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