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귤꽃향기에 옛 추억이 마중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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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귤꽃 향에 취해 길을 잃다 (上)

감귤꽃봉오리 활짝 핀 농장서
청아한 연주와 함께 노래 불러
꽃보다 환한 시낭송도 울려 퍼져
지난 6일 감귤꽃향기 나는 감귤밭에서 바람난장이 펼쳐졌다. 홍진숙 作. 귤꽃향기.
지난 6일 감귤꽃향기 나는 감귤밭에서 바람난장이 펼쳐졌다. 홍진숙 作. 귤꽃향기.

어음리에 있는 밀감밭을 찾아 나선 길이다. 오로지 믿을 건 내비아가씨뿐이다. 애조로를 지나고 유수암을 거쳐 장전리 마을과 소길리도 지나고 납읍리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보이자 슬그머니 의구심이 싹튼다. ‘이 길이 맞나?’ 어음리는 애월읍 중산간 마을에서 고지대에 속한다는 정보를 기억해 내고는 다시금 내비아가씨의 지시어를 따른다. 시나브로 당도한 ‘탐라뜰 농장’이다.

오늘 바람난장 장소는 한창 꽃봉오리를 펼쳐 향기를 내뿜는 감귤밭이다. 시조시인 문순자 님이 남편분과 함께 가꾸는 과수원이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에 과수원을 둘러본다. 모든 게 소담스럽다. 부지런한 주인의 손길을 닮아서인지 원평소국도 모두락이 피어 있고, 체리 나무도 블루베리 나무도 제 소임을 다하려는 듯 열매를 매달고 있다. 소철나무 근처 그늘진 곳을 배경 삼아 양애가 고개를 내밀고, 밀감나무 아래 잘잘한 자갈돌이 정성스러운 손길로 놓여 있다. 맛있는 극조생 밀감이 저절로 얻어진 게 아님을 느끼게 된다.

서란영의 팬플루트 연주.
서란영의 팬플루트 연주.

연이틀 강풍과 함께 폭우가 내렸다. 오늘도 날씨가 나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난장을 펼치기에 모든 게 분에 넘친다. 1400평 8년생 감귤나무에서 내뿜는 꽃 향에 취해 잠시 그 자리에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바람이 일렁일 적마다 나비의 날갯짓과 벌들이 붕붕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혜정 사회자가 행사 시작을 알린다. 본격적으로 감귤꽃이 피기 좋은 17도의 온도가 우리 몸에도 자리한다. 서란영 님의 팬플루트 연주가 시작된다. 익히 아는 노래여서일까. 나 또한 한영애의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를 흥얼거리는데 중간중간 간주가 흐르는 시간, 감귤 꽃과 눈 맞춤하는 서란영 님 모습 뒤로 바람이 실려온다. 흥이 오르며 꽃향기도 전염되는데 그 자리에 함께한 모두가 입을 맞춰 노래를 부르는데 팬플루트가 주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온 동네 꽃향기를 다 몰고 오지 않았나 싶다.

17℃, 꽃을 부르는 온도
17℃, 열일곱 살
선물 같은 하루하루
고사리 꺾다 보니
그직아시날부터 핀 꽃
벙뎅이 벙뎅이

어쩔거나 유채도 왔으니
머리핀 꽂고
풀치마 입고
사진이나 찍는 봄
어디 사는 누구 마중이나 가볼까

장쿨레비 왔다 꼬리 자르고
도망가는 한낮

너라는 한없는 마중 앞에
울어예는 가개비 가개비

-강영란, ‘귤꽃 오고 가개비는 울어예’

김정희 바람난장 대표의 시낭송을 들으며 나도 모르게 옛 생각에 젖는다. 어릴 적 학교에 가면 짓궂은 남자애들은 장쿨레비 꼬리를 주머니에 갖고 있다가 여자애들이 근처에 오면 꺼내어 던져 주고는 도망가곤 했었다. 그때 그 철없던 남자애도 이제는 제법 귀밑머리 하얗게 물들어 가고 있겠지…. 어음리 밀감밭에서 꼬리 자르고 도망가는 한낮의 시간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잊힌 듯이 살다가 벙뎅이로 핀 꽃에 취해 머리핀 꽂고 풀치마 입고 올레길 마중 나가는 봄날. 너와 나 우리 모두에게 시의 한 구절처럼 찾아오기를 가만가만 품어 본다.

노래를 부르는 최희수.
노래를 부르는 최희수.

최희수 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바람도 귀를 기울인다. 올 블랙 단아한 모습, 호소력 짙은 가사가 과수원 가득 퍼지면서 첫사랑 아련한 느낌이 향기에 옷을 입힌다. 진해지는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사노라면 언젠가는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하게 될 날을 선물처럼 그려본다.

시놀이팀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시놀이팀이 시낭송을 하고 있다.

시놀이팀의 이혜정, 장순자 님이 스카프에 청록색 원피스를 입고 시낭송을 하는데 꽃보다 더 환하게 다가온다. 낭송시의 제목처럼 감귤꽃이 섭섭하지 않게 타협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

바다다, 일렁일렁 보름사리 애월바다
새별오름 노꼬메오름 떴다가 잠겼다가
해종일 밀당을 하듯
꽃 따내는 이 짓거리

철부지, 저 철부지
목숨 걸 게 따로 있지
사춘기 여드름 돋듯 복작복작 꽃숭어리
다섯 살 감귤나무의 꽃모가질 비튼다

우리, 이왕이면 너 살고 나도 살자
직박구리 여윈 발목 고대하는 첫 수확
하늘도 세상도 절반
타협하는 이 봄날

 -문순자, ‘섭섭한 타협’


(글=조선희 시인)

▲그림=홍진숙 
▲사진·영상=김종석 
▲음향=장병일 
▲음악=서란영 
▲시낭송=김정희, 시놀이팀(이혜정, 장순자) 
▲노래=최희수 
▲총감독=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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