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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제주대학교 명예교수/ 논설위원

퇴직하고 학교를 떠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때 그것들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학교에 가더라도 교정을 거닐지 못한다. “퇴직한 자가 아직도 무슨 미련이 남아 학교에서 어슬렁거리나?”라고 흉볼 것만 같다.

그래도 평생 해오던 일인지라 아직도 새로운 공부에 도전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길을 걸으며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다. 오가다 스치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돌리다 보면, 듣던 강의내용은 어디 가고 “왜, 저 사람은…”이라고 잡념만 가득하다.

문득 정신이 들어 눈을 전방 5m 정도의 아래로 깔고, 지나는 사람을 외면한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에 집중한다. 처음에는 그것도 쉽지 않더니, 이제는 그런대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걷고 멈추며 앉고 눕는 나의 일상행동 중에, 주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을 그치고, 오직 한 가지에 집중해 본다. 조금씩 집중되면서 나머지가 비워지니 마음이 편해진다.

담배를 끊겠다고 억지로 의도하면 더욱 끌려간다. 생각을 비우고 다른 것에 집중해야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스님들은 깨닫기 위해 수행하는 것을 공부한다고 한다. 아직 불교를 모를 때에는, 단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서 공부한다고 하니, “저것이 무슨 공부야 그저 멍때리는 것이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짜 공부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저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참나’를 찾는 중이다.

나는 몸과 마음을 갖춘 그 무엇인데, 이 순간에도 몸은 시시각각 세포가 죽어가고 있어서 전 찰나의 내 몸은 내 몸이 아니고, 마음은 몸보다도 더욱 빨리 변하여, 찰나 이전의 내 마음도 역시 내 마음이 아니니, 어느 것을 두고 ‘참나’라고 할 것인가? 혹 생각이 일어나 너와 나를 분별하기 이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을 ‘참나’라고 한단다.

스님들은 그 ‘참나’를 찾아야 과거급제하는 것처럼 공부가 완성된다고 한다. 사실 세간 시험은 내가 공부한 것을 평가자의 생각에 맞추어야 하지만, ‘참나’를 찾는 시험은 스스로 찾고 當落(당락)도 자신에게 달려있기 때문에, 세간 시험에 합격하는 것보다 ‘참나’를 찾는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더욱 쉬울 것 같다. 그러나 세상에는, 세간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많으나 ‘참나’를 찾는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적다.

이 ‘참나’는 우리와 같은 중생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도 뜻은 없으나 의미 있는 말(화두)에 집중하고, 내일도 집중하다 보면, 영원할 것만 같던 덧없는 나(我)와 나의 것들(我所)에서 빠져 나와, 마음이 편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이 어지럽다. 사기꾼과 그에게 한자리 얻겠다고 종기까지 빨아대며 아부하는 무리는 서로 어울려, 마치 똥파리가 그릇 위의 버려진 음식을 먹겠다고 윙윙거리듯, 합세하여 교묘하게 사람들을 선동한다. 우매한 자들은 저들의 노리개로 전락한 줄도 모르고 좋단다.

시골의 한낱 촌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순리대로 되리라 기대하며 모르는 척 살아갈 뿐이다.

여보게, 덜떨어진 권력자들아! 악착같이 오른 자리가 영원할 것 같더냐? “한 번 더럽혀진 이름은 오랜 세월을 흘러온 장강의 물로도 씻을 수 없다.”고 하지 않더냐?


※본란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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