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세상 건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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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 시조시인

요즘 날씨만큼이나 안개 속을 걷는 듯했다. 눈이 까끌까끌하고 흐릿해지더니 급기야는 눈앞에 벌레가 날아다니는 증상이 더 심해졌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안과병원을 찾았다. 오랜 대기 끝에 이 검사 저 검사 마치고 진료 결과를 들었다. 백내장 진단에 알레르기 염증까지 심하다며 다음 주엔 망막 검사를 하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마음은 잿빛 하늘처럼 우중충했다.

가까운 산책로로 우회했다. 땅만 보고 걸었다. 안약을 넣은 후라 발걸음이 절로 조심스럽다. 그런데도 한 번씩 비틀거린다. 헉! 순간 봄까치꽃을 밟을 뻔했다. “미안해, 놀랐지?” 무릎을 꿇고 여린 꽃송이에 눈인사했다. 배시시 웃는다. 저만치 광대나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붉은 입술을 실룩거린다. 눈을 작게 떠야만 보이는 쇠별꽃조차 철렁했는지 찔끔 눈을 감는다. 아찔했던 마음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자꾸 손이 눈에 갔다. 눈이 간지럽기도 했지만, 눈을 비비면 흐릿한 시야가 조금은 선명했다. 그제야 여기저기 봄의 기척을 알아차렸다. 새싹들은 뾰족뾰족 흙을 밀어 올라오고 그 위로 벚나무가 꽃망울을 툭 터뜨릴 것 같이 힘을 주고 있다.

이내 시선이 노란색에 꽂혔다. 보도블록 사이 납작이 피어 등불처럼 환한 민들레꽃. 겨우내 흙 속 깊이 뿌리를 묻고 억척같은 근성으로 흙을 당겨 꽃을 피웠을 거다. 작은 풀꽃 하나가 두 번 다시 밟히지 않으려고. 흐려진 시야 덕분인가. 무관심으로 보이지 않던 민들레꽃을 다시 보게 되었다. 오늘은 민들레꽃이 내 흐린 세상의 길잡이인 셈이다.

탈무드 이야기다.

「한 남자가 어두워진 밤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는데 반대편에서 누군가 등불을 비추며 걸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는 등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장님인 걸 알게 되었다. 남자는 장님에게 당신은 눈이 보이질 않는데, 왜 등불을 켜고 다니냐 물었다. 장님은 ‘제가 등불을 들고 다니면 눈뜬 사람들이 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장님은 보이지 않은 너머를 위해 등불을 들었다. 보이지 않는다 해서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난 침침하고 흐릿했던 눈 덕분 자연의 배려를 깨닫는다. 장님의 등불처럼 길을 밝혀주는 민들레꽃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안개 때문에 시야가 더욱 흐렸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도 행복과 불행은 마음먹기이듯 민들레꽃에 의지하며 보이지 않던 것에 눈을 두어보련다.

낙엽 속에도 생명은 잉태하고, 죽은 나무에도 이끼의 꿈을 보며, 보도블록 사이에도 싹이 트니... 잿빛 하늘이었던 마음이 한결 상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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