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경전 앞에서
초록 경전 앞에서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한희정 / 시조시인

새해 첫날 해돋이는 어떤 능력을 부여한 것처럼 경외감과 경이로움이 함께 한다. 불쑥 떠오르는 해를 보면 형언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 다가온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바라는 일이 이루어질 것 같은 경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좋은 곳을 찾아 첫 해맞이를 한다.

올해 우리 가족은 과수원에서 해맞이했다. 삼나무 너머로 잿빛 구름이 걷히면서 동쪽 하늘이 넉넉한 품처럼 붉게 물든다. 구름에 가려 보일락 말락 하던 해가 살짝 떠올랐다. 손자와 손녀가 환호성을 지른다. 토끼의 눈동자 닮은 둥근 해와 마주했다. 일곱 살 손녀가 두 손을 모은다. ‘어린 사무엘’ 그림처럼 사뭇 경건하고 진지하다. 손녀는 무슨 소원을 빌까. 필자 역시 두 손을 모으고 어린싹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희망의 세상이길 기원했다.

해거리로 인해 비상품 귤이 많았다. 본전도 못 건질 거 같아 인부 없이 귤을 따다 보니 해를 넘겼다. 아직 채 수확 못한 몇 그루의 귤나무가 애물단지다. 그나마 황금빛이던 귤들은 때를 지나며 폭설에 두어 번 묻혀 얼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알맹이와 껍질이 분리되어 바람을 담고 있다. 손안에서 말랑거리는 촉감이 내 허물인 듯 애석하고 유감스럽다. 톡톡 가위소리와 함께 서둘러 따 내리는 손등으로 초록 이파리가 덮는다. 아! 영락없는 파랑새다. 열매를 따낸 손등에 재빠르게 앉은 파랑새, 그사이 무거웠던 가지들이 덩달아 쑥쑥 일어선다. 수확 끝낸 귤밭은 초록 경전을 펼친 듯 충만하고 평화로운 광경이다.

차르르~ 바람이 불어 금세 이파리들이 도미노처럼 뉘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기분 좋은 소리다. 태풍은 치명적일 수 있지만 적당한 바람은 순풍에 배가 잘 가듯 바른길을 가는 방향키 역할을 한다. 사람의 말에도 이와 같을 거란 생각이다. 새해엔 조금 나아지나 기대했던 정치판이 연초부터 역시나 시끌시끌하다. 말의 품격은 인격이라 했거늘. 아름다운 말, 인간적인 말이 설득력이 강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데 높은 자리의 사람들만 모르는 걸까. 그들에게 정녕 국민은 있기나 한 건지...

법구경에 ‘입은 몸을 치는 도끼요, 몸을 찌르는 칼날’이라고 했다. 세 치의 혀를 잘 못 놀렸다가 곤경에 빠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올해는 부디 세 치의 혀가 세 치의 파랑새를 닮길 초록 경전 앞에서 기원해본다. 모두 한마음으로 끄덕이는 이파리, 바람이 와도 전혀 불안하지도 위태롭지도 않단다. 서로 어우러져 꽃 필 준비만 할 뿐이라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