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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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 / 수필가·삼성학원 이사장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 ‘그 꽃’ 전문)

‘하이쿠’류(類). 고은 시인의 절창(絶唱)이, 가슴 한복판 정곡(正鵠)에 박혔다. 제주컨벤션센터 한라홀. 삼성여자고등학교 총동문회 정기총회 열린 봄밤에.

젊은 날엔 삶의 고개 가팔라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던 꽃들. 노년의 내리막에서 비로소 발견하고, 눈시울 뜨거워졌다. ‘그 꽃’들 만개한 화원(花圓). 개교47주년. 삼성여고라는 뿌리깊은 나무가 피워 낸 ‘만 삼천 이백 오십 두 송이’ 꽃들, 환한 조명 아래 윤슬처럼 눈부셨다.

사제(師弟)의 연(緣)으로, 그녀들을 만났다. 40여년 교단. 밥벌이의 방편이기도 했지만, ‘사람 키우는 직업’이어서 보람과 축복이 더해진 세월이었다.

그래도, 불편한 추억 적지 않다. 그녀들의 여고시절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5년 일반계 전환 전, 실업계일 때가 특히 그랬다.

세습된 가난 때문에, 대학 대신 취업의 문을 향해야 했던 그녀들의 눈동자는, 세상으로부터의 무시와 소외로 자주 흔들렸고, 방년(芳年)의 앳된 얼굴엔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어두운 그림자 언뜻언뜻 어른거렸다.

수업료 제때 내지 못해 행정실에 불려 가거나 눈치 수업 들어야 했고, 수학여행 못 가는 것도 서러운데, 억지로 학교 나가 무력감 곱씹어야 했다. 차비 아끼느라, 먼 길 걸어 통학하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무엇보다 그녀들에 가해졌던 체벌은, 아직도 악몽일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의 채찍이라는 미명(美名) 아래 악용된 교편(敎鞭)은, 때론 흉기가 되어 학생들의 심신(心身)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얼마나 매를 들었으면, 아직도 교직을 ‘교편 잡는다’고 할까. 꽃으로도 때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대로 된 가르침과 사랑 베풀지 못한 회한이 낙인처럼 남아, 제자들 초청에 선뜻 응하기 어려워 망설여진다. 나 대신 훌륭한 스승 만났다면, 더 큰 성장 이루었을 것이라는 자격지심(自激之心). 그럼에도, 환한 얼굴로 맞아주는 그녀들에 대한 그리움 어쩔 수 없어, 용기 내어 다가간다.

젊음의 뒤안길 통과한 그녀들은, 갈수록 당당하고 늠름하다. 모천회귀(母川回歸)의 연어들처럼, 학연(學緣) 따라 세월의 강을 거슬러 온 만남은, 매년 사랑과 존경으로 넘실대는 축제의 바다가 된다.

파안대소(破顔大笑)하고 있지만, 얼마나 많은 인고의 풍상(風霜)들이 그녀들을 거쳐 갔을까. 대추 한 알 붉게 익는데도, 태풍, 천둥, 벼락, 번개, 무서리, 땡볕들 잘 견뎌내야 한다는데, 그녀들이 피워낸 원숙미(圓熟美) 뒤에는 얼마나 많은 결기와 인내가 있었을까. 세상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그녀들.

알아주는 어떤 전우회나 향우회도 따라오지 못할 결속력. 끈끈한 사랑과 우정, 존경을 이어가는 동문가족들의 연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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