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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실 / 수필가

육지 나들이가 잦아졌다.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지하철로 갈아타자마자 분주하다. 눈에 띄기만 하면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오늘은 육지에서 송년회 모임이 있는 날이다. 약속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첫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안에서 착륙 전까지 한잠을 잤는데도 피곤함이 쉬이 가시질 않는다. 비행기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탄 후, 사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다. 다행히도 반대편 문 쪽 끝에 빈자리가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이에게 빼기면 안 될세라 뛰는 듯 걷는다. 사람들이 주변에 서 있어도 아무도 앉지 않은 빈자리, 알고 보니 분홍색 의자였다. 칡과 등나무가 엉겨 배배 꼬인 것처럼 마음이 복잡하다. 
‘서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남자고, 나는 여자니 앉아도 될 것 같은데?’ 
‘임신한 여자만 앉는 자린데, 어쩌려고?’
‘마스크까지 하고 있는데 알 게 뭐야, 그리고 몸도 예전과 다르고.’
‘그래도 그건 아니지.’
‘만약에 앉았다가 임산부가 타면?’
‘슬그머니 일어나면 되는 것 아냐?’
‘그럼, 너는 양심을 속인 게 들통날 텐데?’
관자놀이가 댕기도록 팽팽했던 내 시신경이 몽롱해지며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어 간다. 십여 분을 갈등 속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여의도라는 멘트가 흐른다. 그리고 열차가 정차하자 왼쪽 문이 열렸다. 나보다 서너 살이나 더 들어 보일 듯싶다. 그녀가 들어서자 예약했던 제 자리인 양 임산부 좌석에 앉는 게 아닌가. 그녀가 앉자 나의 눈꼬리는 이마에 닿을 지경이다. 그것도 모자라 비웃는 얼굴로 다가서면서 그녀를 흉보기 시작했다.
‘임신한 것처럼 보여?’
‘아니.’
‘진짜 이 여자 뻔뻔한 것 같지?’ 
‘네가 할 말은 아니잖니?’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오른쪽 문이 열리는 순간, 출산이 얼마 안 남지 않은 임산부가 열차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임산부 좌석에 앉아 있던 그녀가 일어날 거로 생각했기에 서 있던 자리에서 몇 걸음만 옆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눈을 감고 있은 지 오래된 듯, 고개마저 좌우로 흔들고 있는 게 아닌가. 난처한 상황이다. 앞에 앉은 그녀의 다리를 부러 내 다리로 툭 건드렸다. 그녀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임산부를 쳐다보더니 얼른 일어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을 텐데, 몸이 불편하니 마음까지도 병들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작년 이맘때였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려 잠 못 드는 밤이 많았다. 연골이 찢어지고, 그곳의 끝부분이 안으로 말렸다는 진단 결과를 내게 말하며 선생님은 수술을 권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유명하다는 병원을 몇 군데 더 다녀보기도 하고, 고민도 해 보는 게 순리다. 그러나 이번 수술은 가족과 상의도 없이 받았는지 지금도 모를 일이다. 그리 급하게 수술하고, 걷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만 재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급히 먹은 밥이 체한다고 했던가. 요즘, 무리해서 걷다 보면 무릎에 통증을 느끼곤 한다. 원인을 생각해보니, 재활하는 데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점도 있었지만, 체중이 불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자리만 보이면 어떤 자리든 당연히 앉아야 한다는 이 논리가 종종 나를 염치없는 사람으로 만들곤 한다. 어쩌면 임산부 자리에 앉은 그녀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괜스레 행동만 보고 판단하는 나도 그러한 편견의 주체일 때가 더러 있다. 사람의 내면은 복합적이어서 한 마디로 규정지어 말하기 힘들다. 가끔은 생각이란 걸 좀 하고, 살아야 하는 데 말이다. 
매 순간 어떤 일 앞에서도 서툴고 부족하지만, 옳고 그름이 분명한 나였기에 나를 믿었는데 왜 이리 변한 것일까. 연치만 많아졌을 뿐,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가 내게 말해주고 있다. ‘내가 진실을 찾아냈다고 말하지 말고, 내가 진실 한 가지를 찾아냈다고. 좀 더 일찍 자신을 알았더라면 앞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당신은 뻔뻔하다고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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