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성지와 오현단을 방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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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흥식 수필가

어느 늦은 가을 모 단체가 주관한 교육에서 조상들의 고난의 역사와 문화유적지인 이곳 제주성지와 오현단을 답사하였다. 제주성지는 행정과 군사 하천 범람에 대비하여 축조한 성으로 본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1408년에 태종실록에 큰 홍수로 제주성의 관사와 민가가 침수되었다고 했디. 3년 후인 1411년에 이에 대한 정비명령이 내려졌으며 제주성은 산지천과 병문천을 자연해자(垓字)로 삼아 축조되었다.

그 후 1555년 왜구 1000여 명이 침략한 을묘왜변을 계기로 제주성은 규모를 확장하게 되었다. 1565년 부임한 목사 곽흘(郭屹)은 을묘년의 왜변을 되풀이 않기 위하여 동쪽으로 성을 확장하였다. 이로써 제주성이 옛 동문파출소에서 기상청으로 이어지는 성곽으로 확장되었고 그 둘레가 5489척이 되었으며 산지천의 풍부한 수량도 확보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에 1599년 목사 성윤문(成允文)이 부임하여 다시 제주성을 확충하는 수축 공사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남수구와 북수구에 홍문(虹門)을 만들고 남수구 위에는 제이각(制夷閣)을 지으니 이를 남수각이라 불렀다. 제주성 확충공사를 칼바람 부는 겨울에 실시하여 굶주림에 시달리고 돌에 깔려죽는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원망의 높았으며 이를 원축성(怨築城)이라고 불렀다.

그 후 1910년 전국에 내려진 읍성철거령으로 제주성도 헐리기 시작하였다. 1925~1928년 일제시대 산지항을 개발하면서 수백 년에 걸쳐 우리 조상들의 피땀으로 쌓아 놓은 성벽을 헐고 그 돌로 바다를 매립해 방파제 시설을 하는데 써버렸기 때문에 제주성은 그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되었다. 제주성지는 도로와 주택가로 변해 버렸고 오현단 위쪽과 제주기상청 아래 등에 그 잔흔이 일부 남아 있다.

다음에는 오현단(五賢壇)이다. 조선시대에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지방의 교육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祭壇)으로 오현은 1520년에 유배된 충암 김정(金淨), 1534년에 목사로 부임한 규암 송인수(宋麟壽), 1601년에 안무어사로 왔던 청음 김상헌(金尙憲), 1614년에 유배된 동계 정온(鄭蘊), 1689년에 유배된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이다.

1871년 전국에 내려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귤림 서원도 헐렸으나 1892년 (고종29년) 제주유림 김희정(金羲正)이 중심이 되어 귤림서원 자리에 오현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과 제단을 마련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제주시민과 일부 관광객이 찾는 역사공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오현단에는 증주벽립(曾朱壁立)이라는 마애명이 있다. 이 증주벽립은 오현단 유적의 하나로서 현제의 귤림서원 동쪽 속칭 병풍바위에 새겨놓은 글자이다. 그 의미는 증자와 주자가 벽(壁)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현단을 시민들이 애완용 강아지의 화장실로 이용하거나 청소년들이 쌍쌍이 와서 낯 뜨거운 상황이 벌어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오현단 내에 화장실과 쓰레기통이 없어서 시민들이 불편해하고 있으니 시설을 마련해 주었으면 한다. 관광객 1500만 명이 제주를 방문하고 있는데 좀 더 깨끗한 환경이 되어야지 않겠는가. 소중한 문화유적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고민해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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