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슬러야지
추슬러야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길웅 칼럼니스트

‘추스르다’는 추어올려 다스린다는 말이다. 처진 상태에 흥을 불어넣으면, 전후를 갈라놓는 전환점이 된다. 이를테면 몸을 가누거나 일 생각 따위를 수습해 처리한다는 뜻이다. 지난 것에 매몰되지 않고 앞을 내다보는 미래지향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생기 띤 말이다.

겨울의 뜰은 생각지 못할 만큼 내실 있다. 매몰찬 바람 앞에 서성이는 나를 적잖이 놀라게 했다. 조금만 실눈을 하고 들여다보면 초목 군생이 겨울나기에 얼마나 매진하고 있는지, 그들의 마음자리를 짚을 수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저것들은 원래 잘 견뎌내잖아.’ 그저 그럭저럭하겠지 하고 지나치는 건 생명에 대한 참 무성의한 관찰의 눈이다. 조금만 애정을 기울여 다가가면, 그들에게서 삶의 원초적인 몸짓과 진정 어린 표정을 읽을 수 있으리라.

겨울 들어 한라산 어깻죽지에 덮인 눈에 놀라 덧옷을 꺼내던 날, 나는 아파트 둘레를 거닐자 마음 다잡고 13층을 내렸다. 하루 한 번 흙을 밟으며 살자 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나를 추스르기,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우리말 동사 ‘추스르다’는 긍정적 성과를 약속한다. 추슬러 밖으로 나가는 순간 날개가 달린다. 추위에 웬 신명인지 불편하던 걸음에 기운이 도니 모를 일이다.

상록수와 낙엽수가 조경의 품격을 가누며 유효한 비율로 조화로운 숲. 눈이 발가벗은 것들에 먼저 가 있다. 어떻게 저토록 가지런한가. 무성했던 그 많던 잎들이 비만을 부추겼다는 듯 다 버리고 홀가분한 모습들이다. 빈 가지에 잎 하나 남아 있지 않은 무소유. 추위도 아랑곳없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의 반야심경을 몸으로 외고 있다. 저런 독경은 사람을 전율케 한다.

건물에 기댄 백목련, 계절에 저항하는 저들 방식인가. 마른 잎들 사이로 드문드문 작은 꽃망울들을 내밀고 있다. 마땅히 떨어져야 할 것들이 남아 있는 건 자신을 추스르지 않은 것, 꽃망울들도 철부지들의 치기로 다가온다.

덥다 춥다 가리겠는가. 잡풀들이 나무 아래 바짝 엎뎠다. 찬 땅에 살을 맞대고 저대로 겨울을 날 요량인가. 해마다 겪는 고난엔 내성이 생길 것이다. 여기까지 와 있는 저들의 방어기제엔 굽어보는 하늘도 혀를 찬다. 극대화한 추스르기는 닭살 돋는 감탄감이다. 사람이 저들을 눈 흘기며 지나치는 건 자기모순, 입으로 생명 외경을 떠벌이지 말아야 하리.

언제 보아도 산은 산으로 있다. 비바람에 쓸리면서도 지나고 나면 능선을 타고 내리는 원만한 곡선의 아름다운 위의, 사람이 넘보지 못하는 산이 추슬러 놓은 자연의 미학이다. 삼백예순날 아침마다 베란다의 창을 열어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맞추는 것은 그래서이지, 저 한라영산.

나이만큼 과속한다더니, 시간의 속력이 염치없는 요즘이다. 어제가 토요일이라 한 것 같은데 내일이 주말이란다. 시간을 아끼자고 자신을 단속하다가도 짚 더미같이 흐트러지는 게 시간이다. 속절없는 것은 빠르다.

흐트러진 것들이, 가지런히 해줄 정리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단조한데도 산만하고 너절한 공간으로 흐르는 시간을 그냥 놓아둬서 되겠는가. 정리하다 봐도 불어나는 게 책이다. 읽다 넘기지 않은 채 멎어버린 게 한두 권이 아니다. 쓰다 멈춘 메모 수첩에도 눈을 주어야지. 남의 일이 아닌, 시답잖은 내 주변 잡사들이다.

둘레를 추스르며 임인년 한 해를 보내고 싶다. 추스르지 않은 건 정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