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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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숙 / 수필가

늙은 감나무를 바라봅니다. 우리 집 유일무이한 과일나무로 한동안 멋진 외투를 입었던 그입니다. 지금은 단풍 든 잎도 노랗게 물든 감도 없는 빈 몸입니다. 이리저리 뒤틀린 가지엔 희끗희끗 버짐도 피었습니다. 큰 잔치 끝에 뒷설거지를 마친 마당처럼 감나무엔 고요가 머뭅니다. 화단을 정리한 꽃대와 낙엽을 모아 밑둥치에 덮어주며 오는 겨울 잘 지내라 토닥거려 줍니다.

얼마 전 가을이 깊게 느껴지던 아침입니다. 감을 따려고 가위를 들었다가 그만 뒷걸음을 쳤습니다. 말벌 서너 마리가 이마를 맞댄 채 단맛 삼매에 빠져든 걸 보고 지레 겁을 먹은 까닭입니다. 몇 걸음 떨어진 돌의자로 물러나 앉아 그들의 동태를 살폈습니다. 벌들은 한참 단물을 빨고 난 뒤 어디론가 날아갔습니다. 벌에 쏘인 감은 화끈 달아올랐고 아침 햇살에 더더욱 붉어졌습니다.

은목서에 앉았던 동박새들이 그 붉음에 꽂힌 게 틀림없습니다. 벌이 떠나자마자 후르르 날아드니 말입니다. 말벌이 한 곳을 지그시 공략한 것에 비하면 동박새들은 철이 없는 꼬마들 같습니다. 작은 몸을 촐싹거리며 고개는 갸웃, 동그란 눈은 쉴 새 없이 굴려댑니다. 혹여 내가 방해할까 경계하는 눈치입니다. 그러면서도 식탐이 우선인지라 먹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새들은 감을 쪼아 밤 알만한 구멍을 남기고서야 포르르 날아갑니다.

이크, 이번엔 잿빛 직박구리 녀석입니다. 진즉부터 옆집 대추나무에서 동박새들이 떠나길 기다리던 놈입니다. 놈은 사춘기 소년처럼 거침없습니다. 그 성질에 어찌 참고 기다렸나 싶습니다. 녀석은 여기저기 파먹느라 너절해진 감을 뒤로한 채 부리를 닦습니다.

이제 밥상은 전봇대에 앉아 점잖을 떨던 까마귀 양반 차례입니다. 까마귀는 푸드덕 내려와 껑충 걸음으로 밥상 앞에 앉습니다. 마지막 손님인 그는 손주들이 헤집다 남긴 잔반을 처리하듯 말끔히 드시고 꼭지만 남긴 채 유유히 자리를 뜹니다. 시끄럽고 방정맞은 울음소리에 비해 검은 신사는 제법 느긋합니다. 떨어진 감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나비와 개미와 하루살이 등 잡다한 곤충들 차지니까요. 전투적이고 극성맞은 까치가 그들 잔치에 끼지 않은 건 아주 다행이다 싶습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잔치는 끝이 났고, 두 그루의 나무엔 푸르뎅뎅한 감만 두어 개 남았습니다.

동물들이 과일을 탐닉하는 건 노상 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종이 다른 그들끼리 배려하는 모습은 새삼 놀랍습니다. 그만한 질서조차 비일비재 무너지는 곳이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인간이니 그러하고, 곤충과 새이니 어떻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싶습니다. 물론 벌에겐 단맛을 알아채는 능력이 있고, 약삭빠른 날짐승들은 그런 감별사를 이용했겠지요. 하지만 동박새와 직박구리와 까마귀로 이어지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는지요.

지난 삼월, 한창 재미 들린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걸음은 그리 홀가분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은 직장의 꽃인 자리에서 실업자가 되었고, 삶의 환경은 뭍에서 섬으로, 도심 아파트에서 전원주택으로 바뀌었지요. 터무니없이 오른 집값에 주머니가 가벼워진 것도 한몫했습니다. 물론 선택이 우선한 일이었지만.

심란함에 더해 덤불진 나무들이 속을 들쑤셨습니다. 짐을 풀자마자 불러들인 조경사는 늦은 감이 있다면서도 한 트럭 분의 가지를 쳐냈습니다. 그때 마음에 든 것이 감나무입니다. 이사 오기 전 살았던 인근, 감 주산지에서 이미 그의 변화무쌍한 매력에 빠진 까닭입니다. 사람이나 컴퓨터 자판보다, 마당의 풀과 꽃과 나무와 친해지면서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시시때때로 고개를 들어 감나무를 봤습니다. 그러면서 복잡하던 심사가 제법 가셨습니다.

폭서와 태풍을 견디고 가을이 되어 훌훌 비워낸 감나무를 향해 비로소 묻습니다. 자신에게 묻는 물음이기도 합니다.

‘그대, 괜찮은가.’

그는 대답 대신 구름을 인 채 묵연히 나를 내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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