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월드컵 눈물겨운 ‘붕대 투혼’에 온 국민이 감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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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기가 낳은 스타플레이어, 만 35세에 월드컵에 도전해 ‘투혼’
12년 동안 전북 간판 수비수로 활약하며 ‘전북의 방패’로 불려
“진정한 축구 스타는 실력과 기본은 물론 바른 인성도 갖춰야”
경기도 용인시에 살고 있는 최진철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보정동 카페거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살고 있는 최진철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가 ‘보정동 카페거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최진철은 이탈리아의 비에리 등 세계적인 스트라이커들을 꽁꽁 묶어 놓았다.

외신은 “한국 4번(최진철)이 도대체 어떤 선수냐? 한국에 세리에A급(이탈리아 1부 리그) 수비수가 있는지 몰랐다”며 칭찬했다.

외신 기자들은 당시 최진철의 나이가 어렸다면 유럽 리그에서 활약할 선수로 꼽았다.

역대 최고 성적인 4강 진출을 달성한 2002월드컵 태극 전사들은 대한한국 축구의 전설이 됐다. 20년 지난 지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이유다.

▲특활시간에 축구에 빠진 섬 소년

1971년 생인 최진철 전 국가대표 축구 선수(51)는 제주시 용담동이 고향이다. 집안 형평은 넉넉하지 않았다고 했다.

제주서초등학교와 제주중앙중학교, 오현고등학교(38회), 숭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숭실대 대학원에서 생활체육학 석사를 취득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매주 목요일 ‘특활시간’에 축구공을 갖고 놀았던 섬 소년은 축구에 푹 빠졌다.

남들 보다 키가 큰 그는 공격수로 뛰었고, 백호기 대회에서 축구 유망주로 성장했다. 당시 축구부가 있었던 도내 모든 고등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오현고에 이현조 감독님에 이어 서울대 체육학과를 나온 양익전 감독님이 부임했죠. 축구를 해서 대학에 가는 게 목표였는데 대학 진학을 꿈꾸며 오현고를 선택했죠.”

그가 오현고 진학 후 첫 출전한 백호기 대회에서는 라이벌 제주제일고에 석패했다. 다음해는 달랐다. 전·후반 내내 주전으로 뛴 그의 활약에 오현고는 1986~1987년 2년 연속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한 경기에서 혼자 5골을 뽑아내기도 했다.

“과거 제주에서 축구를 잘해도 대학 진학은 어려웠죠. 대다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축구화를 벗었습니다. 건국대와 숭실대 진학을 놓고 고민을 하던 중 저를 포함해 선수 2명을 받아준다기에 숭실대로 갔습니다.”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승부 차기에 승리한 태극 전사들이 환호하며 달려가고 있다. 가운데가 최진철 선수(4번). 사진 제공 대한축구협회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승부 차기에 승리한 태극 전사들이 환호하며 달려가고 있다. 가운데가 최진철 선수(4번). 사진 제공 대한축구협회

▲공격수에서 수비수 전환 후 ‘실수 연발’

숭실대 원흥재 감독의 권유로 그는 공격수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전환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서 실수를 했고, 위치 선정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이 혼났다.

최진철은 대학 3학년 당시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며, 추계대학 연맹전에서 우승을 이끌어냈다. 숭실대 축구부는 창단 10년 만에 전국 대회에서 1위에 올랐다.

그는 상무에서 26개월을 뛰면서 군 복무를 마쳤다. 상무를 제대한 최진철은 1996년 K리그 신인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됐다. 숭실대에서 지도를 했던 최만희 감독이 부임한 전북 현대모터스에 입단했다.

최진철은 1996년부터 2007년 은퇴할 때까지 12년 동안 오로지 전북을 위해 뛰었다. ‘전북의 방패’라는 별명과 함께 전북을 대표하는 간판 수비수로 자리매김했다.

전북의 공격수 김도훈이 일본으로 진출하자, 최진철은 1998년부터 2년간 공격수로 뛰었다.

두 시즌 동안 62경기에서 17골 8도움을 달성했다. 주위에서는 공격수로 전환하라고 했지만, 그는 욕심내지 않고 수비수로 돌아왔다.

▲마지막 월드컵 도전에 나서다

2002월드컵에서 ‘레전드 수비수’로 각인된 최진철은 만 35세인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마지막 도전에 나섰다.

2002월드컵에서 철옹성을 구축했던 김태영은 은퇴를 했고, 홍명보는 대표팀 코치로 부임했다. 언론에서 최진철 은퇴설이 나돌 때였다.

“본프레레 감독이 은퇴를 말리더군요. 저의 경험을 높게 산 것 같습니다. 홍명보 코치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뛰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다음날 아침 신문에 대표 팀 명단에 제 이름이 올라 있더군요.”

2006년 월드컵에서 백의종군한 최진철은 토고와의 첫 경기에서 아데바요르를 꽁꽁 묶으며 첫 승을 올렸다. 이어 강호 프랑스를 상대로 1대 1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최진철은 조별 3차전에서 스위스 선수를 마크하다가 머리를 부딪쳤다. 피가 흐르는 눈두덩이에 붕대를 감고 끝까지 뛰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붕대 투혼’은 최진철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2006월드컵 스위스전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뛰고 있는 최진철.
2006월드컵 스위스전에서 머리에 붕대를 감고 뛰고 있는 최진철.

▲유소년 대표팀 이끌며 브라질 격파

황혼기에 접어든 최진철은 2007년 은퇴 후 유소년 국가대표팀 육성에 힘썼다.

그는 2015년 17세 이하(U-17) 칠레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객관적인 열세에도 유소년 대표팀은 상대를 꽁꽁 틀어막는 수비로 브라질을 1대 0으로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철저한 수비 전술과 용병술, 선수들의 강한 정신력이 ‘삼바 축구’를 제압했다.

한국 남자축구가 국제축구연맹(FIFA) 대회에서 브라질 대표팀을 이긴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그는 2015년 11월 황선홍 감독 후임으로 포항 스틸러스 감독에 취임했다. 안타깝게도 10개 월만에 자진 사퇴했다.

“성적은 부진했지만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간섭이 심했죠. 선수들의 근성이나 투지도 떨어졌구요. 특히, 포항 서포터즈의 일부 광팬들은 경험이 많은 저를 가르치려고 했죠. 감독 사퇴보다는 명예회복도 해보고 싶었는데 마음을 비웠습니다.”

이후 그는 2018년 한국프축구연맹 경기위원장으로 부임, 1년간 축구 행정가로 활동했다.

▲‘축구 예능’보다 지도자의 길 원해

“월드컵에 함께 뛰었던 김병지 선수가 방송에 출연하자고 제안하면서 지난해 2월 설날 특집에 출연했습니다.”

설 특집으로 방영된 ‘골 때리는 그녀들’은 여성들이 명절 스트레스를 축구로 날린다는 주제로 기획됐다.

감독은 최진철·김병지·황선홍·이천수가 맡았고, 배우와 가수가 모인 ‘FC불나방’, 개그우먼으로 뭉친 ‘FC개벤져스’, 모델들이 모인 ‘구척장신’ 등이 한 팀을 이뤘다.

“남자도 아닌 여자가, 자녀가 있는 엄마도 악착같이 볼을 다투는 것을 보고 많은 국민들이 응원을 했죠. 오히려 축구를 잘했다면 시청자들이 외면했겠죠. 실수를 하고 엉뚱한 패스에 모두가 동질감과 대리만족을 느낀 것 같습니다.”

원래 이 방송은 1회성이었으나 히트를 치면서 정규 프로그램이 됐다.

“강하게 보였던 연예인들이 오히려 더 여렸고 헌신적이었습니다. 바쁜 스케줄을 마치면 지칠 법 한데 여성 방송인들은 훈련과 경기에서 열정적으로 뛰었습니다. 안 쓰던 근육이 뒤틀렸고, 부상자가 속출했죠. 출연료보다 치료비가 더 나왔습니다.”

‘축구 예능’에 두각을 보인 그는 ‘전설이 떴다-군대스리가’에도 출연 중이다.

최진철은 향후 방송활동 보다 축구 지도자가 되길 원했다. 20년 전 월드컵 4강 진출을 재현할 태극 전사를 키우게 목표다.

“축구 꿈나무들은 우리 세대와 달리 많은 기회가 있고 진로가 열려있습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진출 무대도 열려있습니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면 기회는 찾아옵니다. 실력과 기본을 갖추면 축구 스타가 되지만, 진정한 스타는 인성(人性)도 갖춰야 합니다.”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이긴 대표팀이 환호하고 있다. 손을 번쩍 든 이가 최진철 선수(4번). 사진 제공 대한축구협회
2002월드컵 스페인전에서 이긴 대표팀이 환호하고 있다. 손을 번쩍 든 이가 최진철 선수(4번). 사진 제공 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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