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와 이태원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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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동철 편집국 부국장

52년 전인 1970년 12월 15일 새벽 전남 여수시 소리도 앞 바다에서 남영호가 침몰했다.

서귀포~성산포~부산을 연결하는 363톤급 여객선에는 정원을 초과한 338명이 탑승했다. 연말 대목을 맞아 3개 화물창고에는 이미 감귤로 채워졌다. 선적이 금지된 화물창고 덮개 위에도 감귤 400상자가 쌓였다.

중간 갑판에도 감귤 500상자를 실어 서귀포항을 출항할 때부터 선체는 이미 15도쯤 기울어져 있었다. 적재 허용량을 4배나 초과한 540톤의 화물이 실렸다. 배가 침몰하면서 승객 338명 중 323명(96%)이 사망 또는 실종했다. 감귤을 담았던 나무 궤짝에 매달려 있던 15명만 생존했다.

총체적 부실과 인재로 점철된 참사에서 구조 조치도 미흡했다. 일본 순시선이 먼저 한국 선박이 침몰했다는 무전을 받은 후 한국 해경에 연락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정작, 구조에 나선 건 한국·일본 어선이었다.

추후 인양된 시신은 18구에 머물렀다. 많은 승객들이 차디찬 바다에 가라앉아 시신 수색은 진척을 보지 못했다.

배안에는 결혼식을 앞둔 예비 신랑신부들도 많았다. 가구 등 예물을 사려고 부산으로 가다 변을 당했다. 감귤과 배추를 팔기 위해 또는 부산에서 포목을 사기 위해 배에 몸을 실었던 도민들이 생명을 잃었다.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려던 일가족 5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남영호 침몰 사고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사망 502명)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적재량을 초과한 과적, 항해 부주의, 긴급신호(SOS) 발신 후 신속하지 못한 대처로 피해가 컸던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대다수 유족들은 시신 없이 장례를 치렀다. 서귀포시 정방폭포 공원에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이 건립됐지만 참사의 비극은 잊혀져갔다.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정부와 관계당국이 화물 과적을 철저히 막고, 선박 안전 운항을 강화했다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난달 29일 157명의 희생자를 낸 ‘이태원 참사’에서 경찰의 부실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

국가 안전시스템은 ‘살려 달라’ ‘도와 달라’는 시민들의 외침에 무력했다. 한 시민이 112에 “압사당할 것 같다. 통제 좀 해주셔야 할 것 같다”는 신고를 경찰은 ‘불편 신고’로 여기고 별도 조치를 하지 않았다.

핼러윈 데이를 앞두고 용산경찰서 정보관들은 이태원 일대에 인파가 몰려 안전사고가 우려된다는 보고를 했지만 지휘부는 묵살했다.

이임재 전 용산경찰서장은 관용차를 탄 채 사고 현장 주변 우회로를 찾느라 길에서 1시간가량 허비한 뒤 현장에 50분이나 늦게 도착했다.

1970년 12월 국회 남영호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는 승객 명부에도 없었던 79명이 승선했고, 과적이 상습적으로 묵인돼 왔으며, 과적 시정 요구는 개선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당국의 감독 소홀로 인한 초과 승선과 과적을 사고의 원인으로 결론지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 ‘이태원 참사’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요구서를 지난 9일 제출했다. 국민의힘은 “경찰 수사가 먼저”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국정조사가 실시되면 2016년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국정조사를 하기도 전에 여야는 ‘이재명 대표의 사법리스크 국면 전환’ 대 ‘윤석열 정부의 책임론’을 놓고 맞불을 놓았다. 이태원 참사가 정쟁으로 흘러서는 안 되지만, 대규모 인명피해 발생 원인과 전후 대처에 대한 책임 소재 규명, 재발 방지 대책은 마련돼야 한다. 남영호의 비극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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