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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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익 / 수필가

다시 낙엽의 계절이다. 산과 들이 온통 황금물결로 넘실댄다. 살보드라운 여린 싹을 틔워내 뭇시선을 받기도 하고, 잉걸불 같은 여름 햇살을 막아내는 숲과 그늘을 만들기도 하다가 불과 두 계절 생을 다하고 떨어지는 낙엽. 아무런 저항 없이 난분분히 하늘을 타고 낙하한다.

낙엽은 주로 생의 끝자락을 향해 가는 생명들의 허무함으로 비유된다. 사람들은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노래도 부르고 시도 지으며 애써 위안을 삼는다. 가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낙엽을 소재로 사랑과 이별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고향엔 사십 년 가까이 어머니 홀로 지켜오던 시골집이 있다. 아흔 후반의 어머니가 몇 해 전 요양원에 가게 되자 푸른 지붕 한 채만 오도카니 남아 있다. 주변 울타리엔 백여 년쯤 됨직한 고목들이 울울창창하다. 나무들이 조금만 흔들거려도 ‘솨솨’ 바람 우는 소리가 주위를 공허하게 맴돈다.

뜰 안팎은 생을 다한 낙엽들로 가득하다. 하늘을 떠받치듯 우람하게 뻗어 있는 뒤뜰의 새덕이나무 구슬잣밤나무의 삭정이와 잎새들, 알록달록 가을을 곱게 물들인 마당 앞 감나무의 잎사귀, 나울짝나울짝 유영하며 떨어지는 올레의 담쟁이 잎들까지 공간이 온통 어지럽다. 기력을 다하고 지상에 떨어져 이승과 별리(別離)를 고하는 순간이다. 이별의 몸부림이기라도 하듯 이리저리 구르다가 무더기가 되어 서로를 의지한다. 점점 허적한 공간으로 바뀌어 가는 텅 빈 집은 적멸의 세계가 머잖은 듯싶다.

시내에 살면서도 마음은 늘 고향 집 마당에 꽂혀 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어떤 낙엽이 어느 정도 쌓였을지 눈가에 맴돈다.

매주마다 시골집에 가서 이들을 걷어내는 게 큰 일거리다. 그때마다 마당과 긴긴 올레에서 이들의 이별을 쓸어 담아야 하는 슬픈 고역을 감내하곤 한다. 이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보전하고, 여직 시골집에 감도는 어머니의 체온을 온전히 지켜내고 싶은 간절함에서다.

커다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준비했다. 함박눈 내려앉듯 소복소복 쌓이는 낙엽들을 감당하기가 늘 중과부적이다. 일주일 후 가보면 마당과 올레는 다시 낙엽들이 널브러져 있다. 빨랫줄처럼 마당을 가로지른 거미줄, 항의하듯 달려드는 모기떼,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가는 잡초들도 더불어 저항하는 무리들이다.

어릴 적에 곱게 물든 단풍잎이나 감나무 잎을 따다 책갈피로 끼워 넣곤 했었다. 아름다운 추억들이다. 하지만 지금, 계절의 구분 없이 시골집 마당과 올레를 뒤덮는 낙엽들은 삶의 기운을 뺏어가는 성가신 존재가 되었다. 더 이상 낭만적이거나 추억거리가 아니다. 점차 부식되어가는 육신에 스트레스 하나 얹힌 꼴이다.

일상처럼 낙엽을 쓸어 담던 어느 날 불현듯 한 우문(愚問)이 떠올랐다. 낙엽이 주마다 나를 불러들이는 속내는 무엇일까. 낙엽이 없다면 과연 얼마나 시골집을 둘러볼 것인가. 낙엽은 스스로 낙엽이 되고 싶어 낙엽인가. 오면 떠나고 떠나면 다시 오는 순환의 법칙일 터인데….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마냥 괴로워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만 처량할 뿐이다. 어차피 삶은 고통과 기쁨으로 직조된 것이거늘. 세상은 긍정으로 바라보면 꽃길이요, 부정으로 바라보면 가시밭길 아니던가.

시골 가는 길, 확 트인 평화로(平和路) 들녘을 달린다. 시원한 산바람에 폐부가 활짝 열리고 침침하던 동공 속 렌즈도 또렷이 잡힌다. 가슴속 스트레스 찌꺼기들이 넓은 들판으로 산산이 흩어지는 듯하다. 일상 속으로 분주히 내달리는 자동차 행렬들이 삶의 박동수를 끌어 올릴 듯싶다.

아뿔싸! 울타리의 고목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 심폐기능이 한결 활성화되는 것 같다. 낙엽을 걷어 모으는 순간은 오로지 나와의 대화 시간, 이런저런 사념에 잠기며 반(半)철학자가 되어보기도 한다. 한두 시간의 노동을 통하여 풀어져 가는 근력도 지켜낸다.

즐거운 마음으로 다시 낙엽을 쓸어 담는다. 인생이 마당 앞 홍시처럼 익어가는 나이, 낙엽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방전되어 가던 몸에 새로운 희망이 충전되고 존재하는 이유 하나쯤을 더 찾은 듯싶다. 기꺼이 시지프스의 후예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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