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기(復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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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섭 / 수필가

나는 바둑을 잘 두지 못한다. 그저 두 집 나면 살고 축이나 장문 같은 용어 몇 개 아는 정도지만, SNS의 인터넷 대국은 자주 보는 편이다. 골프채를 한 번도 안 잡아봤지만, 골프 예능 프로그램이나 LPGA 중계는 즐겨 시청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인터넷 바둑 대국을 통해 보는 전문기사들이 두는 수는 묘수이기도 하려니와 상대방의 수를 열 수, 스무 수 앞까지 예측하고 그에 대한 타개책까지 계산한다니 놀랍기 그지없다. 해설자가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한들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가로세로 18줄 교차점에 하얗고 까만 돌이 번갈아 놓일 때마다 흥미진진하다.

연전에, 이세돌과 바둑 AI인 알파고와 치른 대국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방송으로 중계하는 대국마다 실시간으로 관전했다. 아무리 AI지만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만큼은 전문기사가 이길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1승 4패로 지고 말았다. 단 한 번 이겼던 4국의 78수가 신의 한 수라고 난리가 났다. 나는 그 수의 오묘함보다 알파고가 인간을 능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

한판의 바둑은 신통하게도 복잡한 인생사와 닮았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법을 지켜야 하듯이 바둑에도 일정한 규칙이 있고 지극히 공정하다. 두 사람이 바둑판의 361개 교차점에 바둑돌을 번갈아 가며 두는 경기다. 한 번 놓은 돌은 절대 무를 수 없다. 두 기사에게 똑같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하여 반상에 한 수 한 수 돌을 놓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잘못을 고칠 수는 있으나 책임을 져야 하고, 앞앞이 주어진 시간은 하루 24시간씩으로 똑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조건이 같지 않다고, 기회가 평등하지 않다고 아우성친다.

바둑이나 인생이나 선택은 똑같이 어렵다. 기사는 매 순간 수십 가지 선택지 중에 하나를 골라 결정한다. 일수불퇴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단 하루를 사는 데도 크고 작은 선택을 무수히 많이 한다. 행동이나 태도를 정해야 할 때 망설이기만 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을 결정 장애라고 해서 질병으로 치부하지 않던가.

바둑에서 승부를 결정지을 만큼 잘 못 둔 수를 패착이라고 하듯이 인생도 단 한 번의 실수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한 수를 두는 결정도 이렇게 어려운 데, 하물며 결정의 과정과 결과를 빠짐없이 기억하는 복기(復棋)임에랴. 복기란 바둑을 다 둔 후, 그 경과를 검토하기 위하여 처음부터 다시 그 순서대로 벌여놓는 것을 말한다. 전문기사는 많게는 300수 가까운 순서를 단 하나의 착오 없이 기억하고 재현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바둑을 두어 수많은 기보(棋譜)※를 낳지만, 바둑의 과정과 결과가 똑같은 기보는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우리네 인생도 수많은 사람이 태어나 살다 가지만, 똑같은 삶은 하나도 없다. 바둑은 복기로 패착을 가려내어 성찰함으로써 다음 대국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아쉽게도, 인생은 바둑과 달리 다음 판을 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바둑 문외한인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온갖 패착이 떠오른다. 그때 엄연히 다른 좋은 수가 있었는데 그것을 놓쳐 에둘러 왔다. 선택과 결정을 알맞게 하지 못한 탓이다. 욕심이 넘친 수를 두는 바람에 험한 가시밭길을 헤쳐 나오느라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며 지나간다.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할 만큼 우둔했으니 그런 고생은 오히려 당연하다. 인제 와서 뼈아픈 반성과 눈물로 복기랍시고 해 보지만, 한 수 물릴 방법이 없고 새 판을 둘 수도 없으니 그 또한 부질없는 일이다.

다 끝나가는 내 인생의 바둑판을 붙잡고 지난날을 돌이켜본다. 한세상 태어나와 비록 남에게 내세울 만큼 성공한 인생은 아니지만, 작은 울타리나마 가정을 이루었다. 그 안에서 가족과 더불어 호의호식하지는 못했으나 풍찬노숙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좋은 벗들과 술잔 아쉽지 않게 나누었으니 그나마 나쁘지 않은 한판 바둑이 아닐까 싶다.

※ 기보(棋譜): 바둑이나 장기를 두어나간 내용을 기호로 기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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