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각(陰刻)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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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재료 면에 글자나 그림을 오목하게 새겨 넣는 기법이 음각(陰刻), 주변을 파 도드라지게 하는 돋을새김을 양각(陽刻)이라 한다. 도장은 보통 양각하지만 두 가지 기법을 같이 병용하기도 한다.

조각에서는 모티브 부분을 바탕 면보다 깊이 새겨 표현해 심조(沈彫)라고도 하는 수법이고, 판화에서는 윤곽선을 새겨 넣고 백선으로 형태를 표시한다.

비석에 기록하는 비문은 음각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음각함으로써 비석 돌 자체를 글자로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음각하면 돌이 글자를 품는다. 표현하려는 글자 모두가 돌의 품 안으로 들어간다. 비석 전체가 이미 글자가 돼 비문 자체가 돌로 재탄생한다.

그 결과, 놀라운 것은 비석에 새긴 비문이 오래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비석을 새길 때 돌의 질을 신중히 고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모진 풍우를 견뎌내는 것은 비석에 새겨진 글자가 아니라 글자들을 품고 있는 돌이다. 비석 돌이 남아 있는 한 돌에 새겨진 글자는 마모되지 않는다. 비바람이 얼마나 거칠고 턱없이 잦은가.

돌 안으로 파 넣지 않고 글자를 도드라지게 돋을새김했다면 비바람에 닳아 오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천후에 먼저 시달린 나머지 형태를 오래 간직하지 못하고 말 것은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을 일이다. 오래지 않아 글자를 새긴 돌이 먼저 사라진다면, 이건 앞뒤가 이치에 맞지 않는 얘기가 된다. 글자를 품어야 할 모체가 먼저 없어지다니, 글자는 그 순간 흔적도 없이 멸실하고 말 게 아닌가. 글자는 돌의 품 안에 안겨야 구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오랜 시간 속에 돌옷까지 입으면서.

지도자의 등장도 일련의 과정이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감추며 숨으라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돋보이려 조바심치며 버둥대지 말고 비석의 실체인 돌, 곧 글자가 돼 대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지도자라 해도 그가 그의 품으로 대중을 품어 안을 능력은 한계 분명한 것이다. 그 능력이란 걸 내세워 돋보이는 데 집착하면 쉬이 무너진다. 돋을새김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는 대중 안으로 들어가 그 품 안에서 만들어지는 음각의 글자,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힘이 있어, 도드라져 뜨는 것이 아닌, 대중이 자기를 품도록 해야 한다. 지도자라면 자그마치 그런 인식의 자각과 성찰의 안목은 갖고 있어 마땅한 것 아닐까. 대중의 미더움이 쌓일수록 지도자의 위상은 견고하다. 비석 돌은 단단해야 한다. 그래야 거기 음각한 비문이 풍우 성상을 무릅쓸 수 있다. 대중이 있는 한 살아남을 수 있는 지도자라야 한다. 감동을 안기는 덕목이 있다. 겸손과 진실이다.

요즘 나라가 뒤숭숭하다. 고금리, 고물가, 고금리 3고에 국민은 허덕이는데, 정치인들은 일삼느니 정쟁이다. 말끝마다 달고 나오는 게 ‘국민’인데, 손으로 만져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느껴지지 않고 와 닿지 않는 허무맹랑한 이 공허의 끝은 어딜까.

웬 말들은 어디서 끌어오는지 참 험하다. 상대를 따뜻이 품는 너른 가슴이 없으니, 민망하기 그지없다. 국민을 잘살게 하는 게 정치인데, 고성 지르고 눈 부라려 삿대질만 일삼는데, ‘이제 그만들 하고 민생을 챙겨라.’ 불호령 할 지도자가 없는 이 나라가 안타깝다 함이다.

정과 망치를 들고 비석에 나랏일을 ‘음각’할 지도자는 정녕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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