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실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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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미당 서정주 시인은 늘그막에 어휘를 제대로 챙겼던 분이다. 시인에게 언어는 생명이니 그랬음 직하나 여간한 작심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하는 일이 세계의 산맥 천 개의 이름을 외웠다 한다. 색다른 취향이란 생각이 든다.

북아메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내려 아시아 유럽으로…. 산맥 이름을 자근자근 외웠다는 것. 웬만한 근기로 될 일이 아니다. 그 이름들이 우리나라 산맥도 아닌 외국의 낯선 것들이라 황당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한데 유명 시인께서는 하루도 그냥 건너뛰는 일이 없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가 들면서 시인의 노역이 그냥 해본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무방비 상태로 새어 나가는 기억력을 붙들려 안간힘 쓴 것으로, 범상한 사람으로선 생각할 수 없는 눈물겨운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것이다. 시인의 시작에서 전통적 시어의 자기관리가 완벽했다면 결코 그냥 된 일이 아니란 의미다.

내가 글줄이라고 끼적이면서 제일 겁나는 게 어휘 실종이다. 내 글이 노화로 글 자체의 볼륨이 확연히 졸아들었지 않은가 하는 성찰의 눈을 뜨게 된다는 얘기다. 듬직하던 체중이 조금씩 축나다 삭정이 같은 내 몸이 나뭇잎 일렁이는 미풍에도 균형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제발 하잘것없는 기우이기를 바라는 맘 간절하다. 평생 내게 허여된 시간이 있는 한 글을 멈추지 않겠다고 결심한 내게 언어 실종은 웬만한 사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나는 글을 써놓고 퇴고할 때면 눈이 어휘들에 가 있다. 혹여 어휘의 빈곤으로 쓰다 만 문맥이 숨어 있어 저기까지 가야 할 게 이쯤에서 멈추지는 않았나 두리번거린다는 뜻이다. 수필이든 칼럼이든 운문이든 산문이므로 그것이 끌어안아야 할 어휘의 영토는 광막하다. 자그마치 자기가 거느릴 ‘섬’ 하나는 너끈히 돼야 하는 것 아닐까. 극도의 함축을 요구하는 운문(시) 하고는 저절로 차별화해 마땅한 것이라.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게 날로 힘들다.

더욱이 칼럼, 신문글을 쓸 때는 더할 나위 없이 긴장한다. 독자들이 어떻게 느낄까, 나와 같은 생각으로 공감할까, 혹여 내가 너무 외곬의 사유에 집착한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서툰 타자가 오탈자를 날리며 해프닝을 찍어내는 수가 늘어가니 문제다. 30년 글을 올리면서도 쓰고 나면 아직 벌충할 게 남아 있기라도 한 듯 허전해 마냥 껄끄러운 게 신문글이다.

미당 시인을 본받을 순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 무얼 외우면서, 어휘의 누수를 막을 작은 장치를 서둘러 해야 할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 어휘 하나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할 때가 잦으니 그런다. 막상 필요할 때 머릿속에 기억을 가로막는 검은 장막이 덮이질 않는가. 이럴 때를 그냥 놓치지 않는다. 그 말의 주변을 맴돌고 서성이며 꼬투리를 찾아 헤맨다. ‘아, 그렇지.’ 실종됐던 어휘를 찾아 놓고 손뼉 치며 아이처럼 좋아한다. 기억을 훔치는 게 치매다.

아내가 전화를 받으며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이름에 걸려 당혹해하는 모습에 경악한 적이 있다. 충격이었다. 아내에게 의무적으로 신문을 읽도록 강제(?) 하고 있다. 샅샅이 읽으라는 내 눈빛을 보며 빙그레 웃는 아내. 지금부터라도 어휘 실종으로부터 자신이 도망칠 수 있으면 늦지 않을 것이다. 두뇌 활동을 원활하게 하면 분명 답을 얻는다. 나의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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