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각과 수박 참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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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인정을 담아 주고받는 물건을 선물이라고 한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기념일에 많이 한다. 하지만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주고 싶은 이에게 언제 어떤 물건이건 줄 수 있는 게 선물이다. 비싸거나 귀중한 것이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보내는 마음이고 받는 마음이다. 마음같이 소중한 게 어디 있을까. 마음을 곱게 싸서 보내는 만큼 선물은 값지다.

책을 읽다가 공유하고 싶어 다시 서점에 다녀오는 그 걸음은 얼마나 감동적인가. 돈으로 셈할 수 없는 실제적 가치의 실현이라, 보내는 벅찬 마음만큼이나 받는 이의 마음 또한 기쁨으로 충만할 것이다.

연인이라면 어느 날 함께 거닐던 바닷가에서 주운 몇 개의 조가비도, 썰물에 찍은 물새 발자국을 폰에 담은 영상도 좋은 선물이 되지 않을까. 그 조그만 선물에 그 바닷가의 물결 소리며 맞바람에 파닥이며 날아오르던 물새의 날갯짓인들 왜 담기지 않았겠는가. 또 그때 주고받던 사랑의 말들….

폭염에 쩔쩔매다 땀 들인다고 아파트 숲을 찾아 평상에 앉았는데, 문우 L의 전화다. “노각 좋아해요? 몇 개 갖다 드리려고.” 그가 공무원 퇴임 후 채마전을 얻어 파적거리로 농사를 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풋고추나 무 배추 가지면 몰라도 노각이라니 뜻밖이다.

L은 젊을 때 오토바이 사고로 고관절을 크게 다쳐 지팡이를 짚는다. 연전, 재치환수술로 고통을 받았다. 그런 몸으로 농사를 할 만큼 흙을 좋아한다. 수필가가 시간이 되면 글이나 쓸 일이지 그 몸에 웬 농사냐 여러 번 지청구를 했지만, 고집스레 귀에 넣지 않는 그다.

노각은 늙은 오이다. 수확하지 않고 한 달 정도 그냥 두니, 늙을 대로 늙는다. 상수리나무 낙엽 빛깔에 노란빛은 땡볕을 견뎌낸 시간의 흔적이다. 성장과 완숙의 임계를 넘은 것이라 오이보다 두세 배나 크다. 그 큰 걸 다섯 개나 쇼핑백에 담고 와 차에서 내려놓으며 활짝 웃는 팔순 노인의 불편한 몸짓.

며칠 전엔 동생처럼 아끼는 수필가 Y가 수박 한 덩이와 참외 예닐곱 개를 갖고 왔다. 손수 거둔 것들이다. 무더운데 읍내에서 올라오느라 땀에 흠뻑 젖은 몸이 내려놓는 수박을 보는 순간, 그의 노고도 잊고 깜짝 놀랐다. 차에서 엘리베이터까지 어떻게 들고 왔을까. “햐, 토산품전시회 출품 감이네.” 그 큰 놈을, 자신의 경작지에서 따 날라다 차에 싣고 우리 집까지 옮겨 온 Y의 수고로움도 잊고 탄성부터 내질렀다. 크고 무거워 내 힘으론 꿈쩍 않는다.

Y는 주택 옆에 넓은 밭을 끼고 온갖 채소를 경작한다. 그것도 친환경 유기 농법인 걸 아는 이는 다 안다. 독농이면서 수필가, 서예가 그리고 중앙에 나가 대상을 받은 평가받는 환경운동가이기도 한 그. 임의로운 사이라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그를 쳐다보며 활짝 웃기만 했다. 차 한잔하고 돌아서는 정겨운 뒷모습이 깊이 각인됐다. 잊지 못할 일이다.

하도 커 덩치 큰 큰아들을 불러들여 간신히 해체해 찬합 여럿에 나눠 쟁였다. 냉장고에서 한 사발 덜어내 입에 넣었더니, 오장육부가 다 서늘해 잠시 가마솥더위를 물렸다. Y의 세심한 마음만큼이나 꿀맛이다.

무더위 속에 마음 넉넉한 두 분에게서 선물을 받아설까. 종일 마음이 들떴다. 늙은 오이 노각과 커다란 슈퍼수박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고맙다. 어떻게 갚을까. 거두기만 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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