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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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선

오래전, 화장품대리점을 운영하던 시절이다. 일 년에 한 번씩 연말이 되면 서울에서 큰 행사로 판매왕을 뽑았다. 제주에서는 다섯 명의 판매사원이 행사에 참여했다. 그날따라 진행요원은 남달랐다. 수상자도 엄격하게 비밀에 부쳤다. 행사장으로 사용하는 대형 호텔조차 바꾸어가며 새로운 형태로 신상품을 출시하고 품격있게 꾸민다.

영업본부장이 사회자가 되어 색다른 분위기를 여러 군데 연출하였다. 지역 장기자랑도 열어 상금을 시상하기에 분위기는 열정으로 달구고 있었다. 중반을 넘어 마무리를 앞두니 두서너 종류만 남겨둔 상태였다. 사회자는 갑자기 전무, 상무, 영업 이사를 호명하였다. 호명받은 세 명은 무대 아래에서 와이셔츠 차림에 수건을 팔에 걸치고 단상 위로 올라섰다. 지역대표 삼백여 명은 원탁에 둘러앉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갑자기 조용해졌다.

세 명의 간부는 간격을 벌리고 정면을 향해 섰다. 다음은 영업 대리가 팔걸이의자를 하나씩 들고 올라왔다. 진행자는 나이 든 판매사원 세 명을 불렀다. 개인 인터뷰를 하면서 한 사람씩 그동안의 판매방식을 묻고 애로사항을 질문하며 자리에 앉게 하였다. 인터뷰하자 그동안의 고충은 보따리 풀 듯 눈물 바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눈과 비가 내려도 일과처럼 매일 시장 한 바퀴를 돌았다. 고객을 만나려고 채소 보따리 풀어 헤친 어르신에서 재래시장의 상인까지 화장품 가방을 어깨에 맨 채 다녔다. 상인에게 화장품을 권하면 매일 조금씩 입금정리 하여 차감시키므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여기까지는 단상 위의 여인이 연장자일지, 근무 년 수 오랜 직급일지, 판매왕인지 가름치 못했다. 세 여인은 화장품 판매수익으로 자녀 교육과 결혼을 시킨 산 증인들이다. 다음 영업팀 직원을 호명하니 대야에 물을 담고 올라왔다. 아는 얼굴이 무대 위 화면 가득 보이자 단상 아래의 참여자는 키득거리며 웃기도 하였다. 그 자리에 참석한 판매원들은 연말 행사장에서 흥에 취했다가 다음 해의 판매향상을 위해 도전 의지를 갖는다.

예전에 보지 못했던 진행순서에 회사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한 줄만 알았다. 대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어 화면에 비추었다. 진행자는 의자 뒤에 서 있던 간부를 앞으로 나오라 하였다.

지금부터 세족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와이셔츠 복장을 한 세 명의 간부는 앞으로 나왔다. 팔에 걸쳤던 수건을 의자 팔걸이 위에 올려놓고 바로 섰다. 사회자의 멘트는 이어졌다.

오늘이 있기까지 여사님의 발이 있었기에 회사가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따뜻한 약초 물에 굳어진 발바닥을 씻겨드리고자 합니다.”

고령의 판매왕은 영문도 모른 채 무표정하게 앉았다. 단상 위의 브이 티 알 화면에는 일거수일투족이 확대되어 멀리까지 보였다. 그 행동을 바라보는 우리는 긴장의 순간을 놓칠 수 없었다. 양말을 벗기려는 간부와 발을 보이지 않으려는 연장자 판매원 사이에서 눈물과 웃음바다가 이어졌다. 판매용 화장품 가방을 메고 필요한 물건 전하며 오갔던 길이 얼마나 되었을까. 고령의 얼굴은 깊은 골 주름 사이로 흐르는 세월의 더께가 지구 몇 바퀴는 되어 보였다.

한 달에 운동화 한 켤레씩 교체해야 한다는 판매사원은 월 판매액만 1억 원에 이르렀다. 걷는 것만큼 판매량은 늘어났기에 공을 인정하며 따뜻한 마음을 전달했던 세족식이었다. 진정성이 깃든 회사 수뇌부의 깜짝 이벤트는 참여자 모두에게 가슴 뭉클한 추억으로 남겼다. 영업의 성과는 머리에서 멀리 있는 발바닥이 걸어간 결과였다.

몇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족식 연상만 하면 그때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온다. 굳어진 발바닥을 어루만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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