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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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선생님, 허리 치수가 얼마입니까.

뜬금없이 걸려온 목소리다. 어머님 제사를 모시러 동생 집에 왔다 가는 길에, 지하상가에서 청바지매장을 지나다 선생님 생각이 났다고 한다. 스승의 날 즈음이면 선생님, 고맙습니다는 리본 단 화분을 보내오곤 하는 제자다. 고마운 마음만 간직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젊은 교사 시절 열정만 있었을 뿐, 따스하게 학생들을 보듬어 주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닷새쯤 지나 바지가 도착했다.

바지에 담긴 제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수선점에서 기장을 줄였다. ‘제자 바지는 엉덩이와 허벅지는 넉넉하고 내려가면서 점점 좁아진 청바지이다. 네 개 주머니와 오른쪽 주머니 속 작은 시계 주머니, 작은 구리 리벳(대가리가 둥글고 두툼한 버섯 모양의 굵은 못)과 벨트 고리, 금속 지퍼와 지퍼 위에 버튼 등으로 짜였다. 또한, 원단에 스판덱스 성분이 있어 쉽게 구겨지지 않아 얼마나 편안한지. 집에서나 외출할 때나 계절을 넘나들며 교복처럼 입고 다니다 보니 어느새 분신이 된 것 같다.

하루는 바지를 세탁하고 건조대에 뒤집어 널다가 안주머니 태그에 쓰인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 18291902)’ 글자와 마주쳤다.

 

“1873년 리바이 스트라우스에 의해 만들어진 청바지, 145년 넘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서구의 정신을 상징하는 미국의 전통이 되었다.”

 

청바지 약사(略史)가 아닌가. 1850년대 노동자들이 금광을 찾아 캘리포니아 광산 지역으로 물결처럼 몰려들던 시절. 독일 태생 유대인 리바이 스트라우스가 광부들의 옷이 쉽게 찢어지자 착안한 옷이다. 소재는 돛을 만드는 캔버스를 사용했는데, 박음질 또한 튼튼해야 했다. 때마침 유대인 재단사 제이컵 데이비스가 광부들의 바지 솔기가 쉽게 헤지는 것을 보고 리벳을 생각해내었다. 1873년 두 재단사가 공동으로 리벳을 박은 남청색 바지의 특허를 받아, 미국 최초 의류브랜드인 리바이스 청바지가 탄생했다.

이렇게 태어난 워크웨어가 세계인의 바지가 되다니. 다니엘 밀러는 글로벌 데님(Global Denim, 2017)에서 서울, 베이징, 이스탄불, 리우데자네이루 등 대도시에서 지나가는 백 명의 옷차림을 무작위로 관찰했는데, 절반 넘게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다. 그런가 하면 1997년 덴버 ‘G7 정상회담에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서부의 저녁에 참석한 내빈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오늘날은 어린이 젊은이 늙은이도, 남녀 직장인도, 실리콘밸리의 기업인도 즐겨 입는 다양한 색깔과 디자인의 데님으로 진화했다. 리바이스는 정녕 세계인의 바지가 된 것이리라.

공항 게이트에서 딸과 손녀를 기다린다. 약속이나 한 듯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청바지 3대의 만남이다. 반 청바지를 입은 초등학교 일학년 손녀와 라이트 인디고를 입은 딸이 얼마나 편하고 맵시 있게 보이는지. 마침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한 날씨여서 손녀는 여름에 갔던 해수욕장을 가고 싶다 한다. 바다 물결이 밀려 나간 모래톱에서, 두 손으로 굴착기처럼 모래를 파 올리며 성을 쌓는 청바지 모녀를 휴대폰에 간직한다. 할아버지는 다니엘 밀러처럼 모래톱, 해안 산책로 등에서 마주하는 행인들 바지에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낯선 사람도 청바지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가 보다.

도대체 광부의 작업복이 인종, 국경, 남녀노소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젊음과 자유, 저항과 개척 정신을 상징하고, 어떤 이는 섹시한 이미지를 표출한다지만, 인생의 겨울을 살아가는 나에겐 편안한 착용감과 실용성이 아닐까 싶다. 아내의 병실에서 온종일 혹사당해도, 정원에서 무릎 꿇고 풀을 맬 때도,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덩이에 때가 묻어도 괜찮다며 참아낸다. 게다가 어떤 옷과 함께 입어도 모나지 않고, 입을수록 친숙해지며 인격화되기 때문이리라. 내가 옷이라면 청바지이고 싶다.

아내와 동행하던 예배당 가는 새벽길, 무릎이 해지고 바짓단이 닳은 제자 바지가 선생님, 젊게 사십시오하며 아내의 빈자리를 위로해주는 듯. 언젠가 헤어질 때가 오면 아쉬움이 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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