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련화를 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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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옥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베란다로 향한다. 그 곳을 가득 메우고 있는 크고 작은 식물들과 소소한 수다를 떠는 즐거움 때문이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일까?’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노라니 내 입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진다. 얼마 전 심은 한련화에 꽃망울 몇 개가 달려 있어 이제나 저제나 꽃피기를 학수고대했는데, 오늘 한꺼번에 꽃불이 일어난 것이다. 아침 햇살에 춤추듯 피어 오른 꽃잎들은 전쟁에서 이긴 병사처럼 당당하다. 방패 모양의 둥근 잎과 투구를 닮은 꽃 때문에 유럽에서는 승전화勝戰花로 불리기도 한다.

봄의 정취가 한창 무르익던 날, 화원에 들렀다. 유치원 아이처럼 이름표를 단 꽃모종들이 줄지어 있었다. 만화방창, 온갖 꽃들이 피어있는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식물이 눈에 띄었다. 줄기와 잎이 서로 뒤엉킨 사이로 작은 꽃봉오리들이 수줍은 듯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갓 시집 온 새악시처럼 고왔다. 동그란 잎들도 앙증맞고 귀여웠으나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줄기 때문에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손님, 한련화 한번 키워 봐요.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꽃집 주인의 말에 반신반의하며 세 포기를 사서 큼직한 토분에 심었다. 가느다란 줄기와 작은 잎들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아무리 걷어 올려도 몸피가 기울고 중심을 잡지 못했다. 안 되겠다 싶어 지지대를 세우고 줄기와 잎을 끈으로 묶어 주었다. 집안일을 하면서도 자꾸만 베란다 쪽으로 눈길이 갔다. 들며 나며 바라보아도 그대로여서 마음이 초조해졌다.

며칠 뒤, 화단에 간 나는 깜짝 놀랐다. 늘어졌던 줄기와 잎이 우뚝 서 있는 게 아닌가. 18층 아파트에 들어오는 햇살과 바람이 땅에서 자랄 때와 같지 않았을 텐데도 금방 적응한 녀석들이 기특했다. 꽃대를 올리고 꽃잎을 영글게 하고 줄기를 이쪽으로 낼 것인지 저쪽으로 낼 것인지를 저희들끼리 알아서 척척 해내고 있었다.

화분흙이 포슬포슬하게 말라버리면 물을 주고, 가끔씩 베란다 창문을 열고 닫아 주었다. 햇볕이 강하면 블라인드로 조절해주고 잘못 자란 부분이 있으면 걷어내어 꽃 피우는 일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했다.

몇 달 전만 해도 식물 기르기엔 문외한이었다. 가끔 집에 들여온 꽃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생기를 잃고 시들해져 버렸다. 물도 영양도 충분히 주었는데 무슨 까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꽃집 주인에게 물었더니 식물도 사람처럼 공을 들여야 한다고 했다. 물과 거름도 제 때 주어야 하지만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걷어내는 용기도 필요하며, 때론 진득하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식물을 키웠으니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여러 종류의 꽃과 나무가 가득한 화단은 하루가 다르게 생기 있고 활기가 넘쳤다. 시시때때로 예쁜 꽃을 피워내고 신선한 공기까지 듬뿍 제공해주었다. 내가 준 사랑보다 몇 배 더 이자를 보태 되돌려 주었다. 많은 식물 중에서도 유독 한련화에 마음이 쓰였다. 가냘픈 줄기를 타박하지 않고 힘을 모아 화사한 꽃을 피워내는 강인함 때문이었다.

그에 비하면 난 얼마나 옹졸한 사람인가.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늘 남 탓으로 돌렸다. 운이 없어서, 남편을 잘 못 만나서, 자식 때문에 등. 어떤 불평도 않고 홀로 견뎌내며 일어서는 한련화로 인해 귀한 깨달음을 얻었다.

연지 찍은 볼처럼 발그스레한 꽃잎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마음에 온기가 전해온다. 도톰한 잎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본다. 아릿한 향기가 온 몸으로 번져나간다. 절망을 이겨낸 저 한련화처럼 내게 닥쳐올 시련들을 헤쳐나가리라 다짐하며, 가느다란 꽃대를 오래 쓰다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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