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연못의 비애
옛 연못의 비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오승익

어릴 적 동네 어귀에 셋성구못이라는 연못이 있었다. 빌레라 부르는 암반 터를 파내어 만든 넓고 둥그런 연못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 마시며 생계를 이었다. ‘물은 만물의 근원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곳의 물은 사람들의 생명줄을 이어주는 감로수였다.

시골집을 다녀오다 어린 시절의 정취를 따라 연못엘 가보았다. 일순간 육십여 년 전의 영상들이 수면 위로 아슴히 떠 오른다.

어머니가 홀로 물허벅을 이고 셋성구못으로 물을 길으러 나선다. 물항이 고파가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못 가운데에는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 암반이 널따랗게 깔려 있다. 농사를 짓느라 거칠어진 어머니의 손등도 이와 같았다. 어머니는 농사일을 언제나 맨손으로 하셨다. 작업용 고무장갑이 없던 시절이어서 김을 매고 보리 씨를 섞은 돗걸름을 뿌리고 유채나 마소의 먹이를 베는 일을 모두 그렇게 했다. 굳은살이 맺힌 손등과 손톱 부위엔 붉은 줄기가 지그재그 그어졌다. 그래도 고작 동동구루모를 바르는 게 전부였을 뿐이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의 등허리는 버거워지고 한숨 소리는 더 커져만 갔다. 홀로 가족을 짊어져야 하는 압박감과 이런저런 잔병들이 늘 어머니를 괴롭혔다. 주무실 적마다 ‘아이고’ 하는 한숨 소리는 적적한 구들 안을 가득 메웠다. 날마다 길어다 먹는 셋성구못의 물만이 어머니의 혈관을 타고 흐르며 지친 육신을 풀어주는 주는 듯했다.

잡풀들을 뽑아내고 가라앉은 흙과 잡석들을 걷어내며 연못을 닦는 날이다. 바지런한 반장의 재촉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른다.

“물 닦으러 나옵서~!”

아직도 귓가에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듯하다. 한겨울 보리 파종을 필두로 봄이 오기 시작하는 바쁜 일상에도 물통을 닦는 대동 일엔 누구나 빠질 수가 없다.

원래 마을 어귀에는 ‘서성구못’, ‘동성구못’, ‘웃성구못’이라는 세 군데의 연못이 있었다. 처음에는 거북이 등처럼 생긴 연못이 세 군데 있다고 해서 ‘삼구못(三龜池)이라 부르다 음운이 변하면서 ’성구못(渻龜池)‘으로 바뀌고, ’서성구못‘도 ’셋성구못‘이 되었다. 어머니가 올해 상수의 나이까지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장수거북 같은 연못의 물 덕분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어머니는 아직도 정신이 좋으신 편이다.

과거 기록에 못의 깊이는 두어 뼘 정도. 못 속에는 풍 치료에 효험이 있다는 드렁허리를 비롯해서 개구리와 돗줄레, 물벼룩, 올챙이 등이 살고 있었다. 또한 부처꽃을 비롯하여 기장대풀, 창포, 자귀풀 등 다양한 수중식물이 연못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 셋성구못이 동네에 수도가 들어오면서 돌보는 이 없는 천덕꾸러기가 되고 말았다. 연접한 도로가 확장되면서 연못은 뭉텅 잘려 거의 반쪽이 되었다. 부엌의 귀퉁이를 차지하던 물항은 자취를 감추고 물을 길어오던 할머니, 어머니들도 세월의 열차를 타고 멀리 떠나버렸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상처 입고 버려지고 잊히고 있다.

어머니의 한평생 삶과 이웃들의 숨결이 오롯이 맺혀 있는 셋성구못. 얼마나 많은 이들이 여기서 목을 축이고 힘을 얻으며 묵묵히 생을 이어왔을까. 눈물겨웠던 지난날의 삶과 올올이 맺힌 추억들이 연못과 함께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까운 심정이다.

잡풀 속에 숨죽인 듯 괴어 있는 물웅덩이와 풍화되어 초라하게 붙어 있는 명패만이 이곳이 지난날 음용수 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마을의 젖줄이었던 옛 연못을 기억하려는 지역사회의 작은 관심과 노력이 아쉽다.

윤슬처럼 찰랑거리는 맑고 고운 물 한 모금 마시고 싶은 심정을 뒤로한 채, 어린 시절의 나만 홀로 노닐다 처연히 발길을 돌렸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