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기록이 되지 않기를
마지막 기록이 되지 않기를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김애숙 수필가

벌거숭이 뽕나무에 메마른 잎 몇 개가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다.

임인년 들어 첨세병을 드시고 아흔다섯이 되신 어머니는 내일을 알 수 없는 운명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지내고 계신다. 60여 년을 함께 했던 짝을 떠나보내고 홀로 된 지 이십 년. 곁에 모시지 못하기에 하루가 불안하여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전화를 드리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신 말씀을 기록해 왔는데, 어느새 일 년 반이 넘었다. 오늘은 어떻게 지내셨냐고 물으면, “그렁숭 저렁숭 하루를 무사히 보냈져.” 하시는 어머니의 대답은 동어반복의 연속이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외조부님 산소를 찾았다.

구순에 들어설 때부터 어머니는 죽기 전에 부모님 산소에 한번 가보고 싶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 장례를 치르고 처음 가본 산소는 서귀포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높은 동산 양지바른 곳에 있었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리 정돈되어있는 걸 보니 외사촌 오빠의 자상한 손길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봉분 앞에 앉아 술잔을 올리며 아버지! 어머니! 불효자식 늙어서야 찾아왔수다. 그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우다.”라며 곡지통을 쏟아놓았다.

무덤 앞에 서니 왕대나무가 울창했던 외가가 떠올랐다. 지네에 물린 내 머리에 담배 부스러기를 비벼 발라주시던 외할아버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며 먼 길을 배웅해주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게 다가왔다.

그 외가가 지금은 주인이 바뀌고 왕대나무숲은 귤밭으로 변해버렸다. 찾아갈 친정이 사라져서 어릴 적 추억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어머니는 모든 설움이 밀려오는지 한동안 무덤 앞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참배 후 어머니는 바다를 바라보며 좀 전의 슬픔은 잊은 채 외할머니의 이야기에 신바람이 났다. 여자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절에 학교를 보내주셨고, 학교에서 돌아올 때는 먼 길까지 마중 나와 에구 이 조그만 발로 그 먼 데를 어찌 다녀왔을까?” 하며 꼬옥 안아 주셨다고 목청을 높이셨다.

그때의 그 품이 그리워서일까. 잠시 말을 멈추고 먼 하늘을 쳐다보는 어머니는 본향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외할머니께서 마중 나오시길 바라는 눈치였다. 여러 번 넘어졌지만, 그때마다 크게 다치지 않은 건 외할머니의 영혼이 지켜주신 덕이라 여기고 있는 듯했다.

일제 강점기에 힘든 공부를 한 분답게 결혼한 후에는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을 섰고, 동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믿고 따랐다. 부녀자들과 모임을 만들어 저축한 돈으로 생전 처음 간 서울 여행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늘어놓으시는 젊은 시절 최고의 사건이었다. 백수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티브이보다는 신문을 읽어 보는 게 재미있다는 어머니. 살아오면서 외할머니께 제일 감사한 일은 공부를 시켜주신 것이라 했다.

그날 묘소에서 마지막 절을 하고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부모님을 뵙게 되니 오랜 체증이 내려간 것 같다, 소원을 이루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라며 흐뭇해하셨다. 그 간단한 일을 뒤늦게 도와드린 것이 송구스러웠으나, 무거웠던 내 마음도 한결 홀가분해졌다.

여자로 태어나 종갓집 외며느리로 살면서 윗사람이 되기까지 어머니의 일생은 평탄치만은 않았다. 육군 장교였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느라 잦은 이사를 해야만 했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고부간의 갈등으로 보따리를 싼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남매를 위하여 참고 살았지만, 60대 중반 사십 대의 외아들이 돌연히 떠나버려 그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사느라 칠, 팔순, 잔치는커녕 생신상도 거절해 오셨다.

이제는 내일이 온다는 보장이 없기에, 모든 걸 내려놓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여 살고 싶다는 어머니.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지만, 신이 주신 날까지 부디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 휴대폰을 손에 쥐고 온종일 전화를 기다리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오늘은 무신거 헙디강?”

무신거 허느니 그렁숭 저렁숭 오늘도 무사히 보냈져.”

바짝 말라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뽕잎을 바라보며 오늘의 기록이 마지막이 되지 않기를 보이지 않는 신께 두 손 모았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