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잘’의 함수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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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철 수필가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술잔이 어지럽게 오가고 여러 가닥의 대화들이 얽히고설켜 허공을 직조하던 와중에 구석 쪽에서 버럭 소리가 들렸다.

그래! 나 치매다. 어쩔래?”

고함과 함께 내 맞은편 맨 끝에 앉아 있던 K 선배가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눅진하고 왁자한 모임 분위기는 흡사 동작 그만의 구령이 떨어진 것처럼 일시에 얼어버렸다.

야 이 사람아 왜 그래? 왜 화를 내고 그래?”

K 선배와 겸상하고 있던 C 선배다. 모임을 하다 보면 사소한 다툼이나 신경전은 늘 있기 마련이지만, 고함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경우는 드물다. 곁에 앉았던 사람이 황급히 일어나 K를 주저앉히고 CK에게 사과했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데 자네 맘에 걸렸다면 미안하네. 농담을 농담으로 듣지 않고 정색하니 오히려 내가 무안하네

그게 농담이라고? 나를 놀린 것이지. 말을 가려서 하게.”

사태가 잘 마무리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K가 먼저 가버렸다. 방 안 공기는 싸해지고 불콰했던 얼굴들이 제 색깔을 찾으며 아무도 먼저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총무는 어정쩡한 분위기를 지워내려는 듯 서둘러 모임을 끝냈다.

며칠 뒤 총무로부터 그날의 경위를 들을 수 있었다. 70대 중반의 K 선배는 평소에 깜빡깜빡 잊기를 잘했다. 조금 전의 일도 잊는 경우가 잦아지니 아들이 치매 검사를 권했단다. 검사를 예약한 뒤로 가족들은 벌써 치매 환자라도 된 듯 그를 조심스레 대했고 그것이 더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검사를 앞두고 치매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예민해 있던 그에게 C 선배가 대놓고 치매 걸렸냐?”고 해버린 것이다. K는 순간 버럭 화를 냈고. C는 분위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사과는 했지만,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K가 서운했다. 그래서 사과 끝에 한마디 덧붙인 말을 K 선배는 농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좀생이라는 뜻으로 오해하여 더 화를 낸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다음날 치매 검사를 앞둔 K 선배의 예민함도, 뜻 없는 농담 한마디 때문에 무안하게 된 C 선배의 기분도 이해되었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해프닝의 발단은 말이었다.

말이란 변화무쌍하여 적절함을 맞춰내기가 매우 어렵다. 사람 사이의 갈등도 항상 말에서 시작된다. 요즘은 정보통신의 발달로 확산력이 빠르고 생명력 또한 길어서 하루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소문이 되고, 잊힌 듯 묻혀있던 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기도 하는 말의 속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늘 말실수를 하게 되는 걸까?

사람이 처신하는데 말을 잘한다는 건 귀중한 자산이다. 다들 말 잘하기를 소망한다. 달변이나 능변이 말을 잘하는 것이라면, 웬만큼 연습하고 훈련하면 누구나 말을 잘할 수 있지 싶다. 하지만 말을 경계하는 격언이나 경구는 말을 잘하기보다, 잘 말하기를 요구하는 것 같다. 비록 눌변일지라도 때와 장소, 상대와 분위기에 따라 적절하게,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말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의 앞에 있느냐 뒤에 오느냐 즉, ‘의 함수관계에 따라서 말의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다. 말에는 늘 후회가 뒤따른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잘 말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술은 참 유용한 음식이다. 사람 사이에 얽힌 오해나 매듭을 푸는데 술만 한 음식도 없다. KC 선배를 한자리에 모시고 술자리를 만들었다. 소주 몇 순배에 오해와 앙금은 햇볕 만난 안개처럼 사라졌다. 치매 검사를 받으며 긴장했던 이야기와 정상 판정을 받은 K 선배의 자랑 아닌 자랑이 대화에 미원이 되었다. 두 분은 술에 취하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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