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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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애 수필가

백구를 처음 만난 것은 찔레 순이 돋아날 무렵 동네 저수지 사랑지자드락길에서였다. 눈처럼 흰색 털을 가진 덩치 큰 개는 눈빛이 맑고 순했다. 가끔씩 우유를 부어주고 말을 걸며 쓰다듬었지만 부끄러움을 몹시 탔다. 제 밥그릇의 밥을 빼앗기고도 멀뚱하게 물러설 뿐 짖는 일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갔다. 못가에는 한때 우리 마을에서 곁방살이했던 장 씨가 여러 마리의 개를 나무에 묶어두고 연명할 만큼 먹이를 주며 사육하고 있었다.

연일 못이 꽝꽝 얼어붙을 무렵 백구의 배가 눈에 띄게 처져갔다. 자세히 보니 새끼를 밴 것이었다. 제대로 해산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된 나는 매일 아침 개집을 살펴보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순산을 위해 멸치 부스러기나 생선 뼈를 챙겨가는 날이 많아졌다. 만삭의 백구가 걱정이 되어 바삐 집을 나섰다. 바람에 뚜껑이 날아간 휑한 개집이 보여 급한 마음에 뛰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며칠간 찜질로 상처를 달래야 했다.

이른 아침, 온몸이 젖은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어미의 넓적다리 사이로 꼬물거리는 것이 보였다. 삭풍의 어둠 속에서 생명을 받아낸 것이다. 뱃가죽이 달라붙어 가슴뼈가 앙상하게 드러났고 부풀어 오른 젖은 혈관이 다 내비쳤다. 저 몰골로 새끼를 어떻게 낳았을까? 어미의 심정으로 따뜻한 먹이를 내밀었다.

날아간 개집 뚜껑을 찾아 덮고 나무에 걸려 있는 넝마를 주워 개집 바닥에 깔아주려고 새끼들을 안았다. 새 생명의 감촉은 따스하고도 뭉클했다. 예민해진 어미가 물까 걱정했으나 내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다. 물기 어린 눈빛에 혼곤함과 경계심이 교차했다. 마른 젖꼭지에서 젖이라도 제대로 나올까 싶었지만 새끼들은 아랑곳 않고 어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해산바라지가 시작되었다. 한 손에는 따뜻한 물이 든 보온병을, 다른 손에는 영양가 있는 개밥이 든 그릇을 챙겼다. 못 입새에 들어서면 마음이 먼저 달렸다. 애써 깔아준 깔개가 간데없을 땐 절로 몸이 옹송그려졌다. 젖몸살을 심하게 앓고 있는 어미에게 강아지들이 젖을 먼저 차지하려고 엉켜 있었다. 저 생명들을 대체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유별난 추위 속에서도 때가 되니 강아지들은 눈을 떴다. 우연히 어미를 간절히 올려다보는 강아지와 그윽하게 내려다보는 백구를 보았다. 옹알이하는 아기와 눈을 맞추며 어르는 엄마의 눈길과 다름없었다. 천진한 눈동자들은 신비로울 만큼 반짝였다.

얼어붙은 개밥 그릇을 녹이고 준비해간 따뜻한 개밥을 부었다. 어미 쪽으로 들이밀며 먹으라고 했으나 일별할 뿐, 고개를 외로 꼬았다. 얼굴이 익을 만도 한데 낯가림은 여전하다. 꼬리를 흔들며 내 주위를 맴도는 강아지들을 떠올리며 서둘러 아침 사랑지로 가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못가 버들강아지가 눈을 틔울 때쯤, 겨울을 잘 이겨낸 강아지들이 어미 곁에서 재롱을 부리고 있었다. 앙증맞게 꼬리를 흔들며 나를 졸졸 따라다녔다. 개집 앞에서 머물다 오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조금 더 크면 저것들은 어떻게 될까.

바쁜 일로 한동안 백구를 잊고 잊다가 불현듯 백구가 생각났다. 빈 개집만 덩그러니 있었다. 장 씨가 개들을 다 처분한 것일까? 아니면 주변을 떠돌고 있을까? 부근 야산을 뒤졌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빈 개집 위로 계절이 시나브로 지나갔다. 단풍잎이 떨어져 차곡차곡 쌓이는가 싶더니 호수 가장자리로 살얼음이 어는 겨울이 다시 찾아왔다. 사랑지를 찾는 일도 뜸해졌다. 가끔씩 백구와 새끼들의 눈망울이 아픈 기억처럼 떠올랐지만 서서히 잊혀져갔다.

겨울이 깊어진 어느 날, 끌린 듯 사랑지에 발길이 머물렀다. 흐린 하늘에서 한 송이 두 송이 눈발이 비치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백구가 어엿하게 자란 다섯 마리 새끼들과 함께 서 있는 게 아닌가. 나는 달려가 백구야!’ 하며 껴안으려 했지만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백구가 사라진 자드락길 위로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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