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의존하던 건설기계 핵심부품 국산화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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⑾오승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
대학 졸업과 동시에 대우중공업 입사설계부서에서 일 배워
그룹 해체·매각 등 역경에도 세계 최고 수준 굴착기 개발 주도
1월 ‘대한민국 엔지니어상’ 수상 후 10월 대표이사로 발탁돼
제주시 삼양동 출신인 오승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사진 왼쪽에서 다섯번 째)가 2019년 미얀마 도로 공사 현장을 방문해 현지 관계자, 현장 직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제주라는 섬에서 태어나 국내 굴지의 대기업 사원에서 대표이사에 오르기까지 어려운 고비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가족과 고향에 있는 친구들이 든든한 버팀목이 됐습니다.”

오승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는 회사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퇴임하는 날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각오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입사 후 지금까지 능력과 노력에 비해 과분하게 받은 것을 생각하면 회사를 떠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게 회사와 후배들을 위한 도리라는 것이다. 퇴직 후에는 한결 여유있게 주변을 돌아보는 삶을 살자는 다짐도 해본다.

어린 시절

오 대표이사는 초등학교 시절 축구에 재능이 남달랐다.

삼양초등학교 축구부 주장으로 활동할 당시 전국소년체전 제주 초등부 축구팀(연합팀)에 선발돼 훈련 중 촌놈이라고 무시를 받았다. 그렇게 축구를 좋아했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은 어린 소년은 당당하게 출전 포기를 선언한다.

그 사건은 두고두고 오 대표이사를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후 제주중앙중을 거쳐 오현고에 입학하며 화북동에 사는 외할머니와 함께 지냈다.

외할머니는 오 대표이사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뒷바라지하며 키웠다. 임종을 지키지 못 한 게 그에게는 지금도 한으로 남았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때쯤 문득 군에 입대한 형의 일기장을 보면서 그의 인생에 첫번째 전환의 시기가 찾아왔다. 어릴 적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일본을 드나들었던 아버지가 서슬퍼런 공안당국에 의해 간첩죄를 뒤집어쓴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전과로 인해 신원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으니 그 아들들도 자연스레 국가 기관이나 주요 정보를 다루는 공무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이른바 연좌제적용을 받는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충격을 받았다.

공직 진출이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결국 자연계를 선택했고, 훗날 과거사위원회가 설립된 후 재심 과정을 거쳐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 회복 후 생을 마감한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남아있다.

대학 생활

재수 끝에 입학한 서울대학교에서의 생활은 한 마디로 회색의 캠퍼스였다.

그 당시 대부분 대학생들은 성인이 되어 자유로운 캠퍼스의 낭만을 기대하며 입학을 했지만 정작 학교의 상황은 그런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속되는 정치적 이슈에 지식인으로서 참여를 요구 받게 되는 상황이 대학 재학기간 내내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정치 형태가 민주국가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정치 참여와 학업의 병행이라는 매우 어려운 결정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오 대표이사는 가족이 처한 현실적 상황과 타협하기로 마음을 먹고 3학년 때부터는 취직 준비를 했고 졸업과 동시에 대우중공업에 입사했다.

굴지의 대기업 중책을 맡다

오 대표이사는 1989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인천에 공장이 있는 대우중공업에 입사, 건설기계를 개발하는 설계부서에 배치되어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990년대 말 대우그룹의 재정난으로 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중공업도 자산관리공사의 관리를 받다가 2005년 두산그룹으로 편입됐다. 이후 두산중공업이 경영난에 빠지면서 두산그룹은 상대적으로 양호한 두산인프라코어를 매각하기로 결정됐다. 최근 현대중공업 그룹으로 편입되면서 현대두산인프라코어로 사명이 바뀌게 된다.

그는 입사 후 20년 만인 2009년 상무로 승진하며 2015년 귀임할 때까지 중국 옌타이에 주재원으로 파견돼 제품 개발을 진두지휘했다.

본사로 돌아온 후 2019년 전무(제품개발 총괄)로 승진했다. 올해 1월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주관하는 대한민국 엔지니어상을 받았다.

그는 해외 수입품에 의존하던 건설기계 핵심부품의 국산화를 이끌었고, 초대형에서부터 미니 굴착기까지 세계 최고 수준의 굴착기 개발을 주도하며 우리나라 건설기계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올해 4월 건설기계사업 본부장으로 선임됐고, 10월 대표이사로 발탁되며 건설기계 사업 뿐만 아니라 산업용 디젤엔진 사업도 함께 이끌어가야 하는 중책을 맡았다.

오승현 현대두산인프라코어 대표이사가 2015년 사내 체육대회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그리운 고향 제주

대학과 함께 제주를 떠나 직장생활을 하다가 은퇴해서 고향에 내려와 농사짓는 친구, 지금까지 마을을 지키면서 나름의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들이 있어 고향은 항상 오 대표이사의 마음에 있다. 그에게 있어 제주는 전 세계 어디와 비교를 해도 손색이 없는 아름다운 섬인 것은 분명하다.

오 대표이사는 군사기지나 제2공항 건설 등 대형 토목공사를 유발하는 국가적 어젠다가 생기면 정치적, 경제적 목적은 차치하고 아름다운 섬이 훼손 되는 자체에 대한 아쉬움이 다가오곤 한다. 고향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갖게 되는 마음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추석에 성산포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이어지는 해안도로의 절경을 보면서 딸이 감탄사를 연발했다현무암과 형형색색의 바다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색의 향연도 그렇고 한라산을 배경으로 거친 흙과 밭담의 색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정말 형언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고 말했다.

꿈을 꾸고 도전하라

큰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준비하라.”

제주에서 미래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열심히 학업에 매진하는 후배들에게 그가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오 대표이사는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힘들더라도 꿈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인생의 터닝 포인트에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어린 시절 독서와 스포츠를 좋아했던 그는 공대에 진학해 기계를 제조하는 회사에서 일을 할 것이라고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공직을 꿈꿨던 오 대표이사는 과감하게 공대를 선택했고 그 결정이 오늘의 그를 있게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도 매우 중요하고 책을 통해 배우는 간접경험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체험을 통해 얻은 지혜와 경험은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줄 것이라 믿는다. 고향 후배들에게 꿈을 꾸고 도전하고 다양한 체험을 하기 바란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형이 남겨준 기타삶의 여유

오 대표이사는 일찍 잠에서 깨면 곤히 잠들어 있는 딸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정도의 낮은 볼륨으로 전기기타를 연주한다. 하루를 시작하기 전 이른 새벽에 기타선율을 만들고 들으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고 마음을 정리하곤 한다.

중학교를 마친 겨울방학에 형이 남긴 통기타가 그에게 큰 기쁨과 위안을 주는 벗이 됐다. 기타 외에 요리하는 것도 즐거운 낙이다.

그는 주어진 삶의 시간 동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오롯이 할 수 있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본다.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시간과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해야 하는 시간을 빼고 나면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닌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하고 싶은 것은 퇴직 이후로 미루게 되지만 정작 퇴직 후에는 체력의 한계 등으로 자신의 좋아했던 취미생활에서 즐거움이 줄어 드는 경우를 보게 된다가능한 할 수 있는 시간을 활용해 삶을 즐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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