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말단 소방사에서 '소방의 별' 소방준감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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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자 광주소방안전본부장, 성차별 극복 여성의 사회적 지위 드높여
어려운 집안 형편에 대학 대신 면사무소 임시직 일하다 공채1기 합격
145만 광주시민 안전과 재난 예방 지휘...따뜻하고 자상한 지휘관으로 조직 활기
고민자 광주소방안전본부장이 광주119종합상황실에서 무전 지시를 내리고 있다.
고민자 광주소방안전본부장이 광주119종합상황실에서 무전 지시를 내리고 있다.

‘아들도 키우기 힘든데 딸까지 공부를 시켜가며 대학에 보낼 필요가 있느냐.’

한 가정의 생계는 물론 남자들을 뒷바라지해야 했던 제주여성들은 가족 내에서도 차별을 받아왔다. 장자 중심의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에서 제주여성은 똑똑하고 뛰어나도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고민자 광주광역시 소방안전본부장(56·소방준감)은 지역과 공직사회에서 성차별을 극복하고 성평등을 일궈내면서 제주여성의 강인함과 용기를 보여준 본보기가 됐다.

▲1984년 공채 1기 여성 소방관이 되다

고 본부장은 1964년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신창초·신창중학교에 이어 제주중앙여고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농사를, 어머니는 해녀를 하며 생계를 꾸렸다. 그런데 부친은 환갑을 맞이한 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일찍 세상을 떴다.

제복을 입는 군인 또는 간호 장교를 꿈꿨던 여고생은 대학에 합격했지만 집안 형편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는 1983년 여고 졸업 후 한경면사무소에서 업무를 보조하는 임시직으로 근무했다.

면사무소 붙여진 여성 소방공무원 채용 안내문을 보고 원서 마감일에 접수를 하고 시험을 봤는데 합격했다.

그는 1984년 11월 전국 여성 소방공무원 공채 1기로 최말단인 소방사 계급을 달았다. 제주에서는 그를 포함해 3명이 합격했다.

당시 공채 1기생 전원은 소방관서 민원실에 배치됐다. 정부는 건축물과 위험물 인허가에 부조리가 만연하자, 이 업무에 여성 공채 1기생 모두를 투입했다.

고 본부장은 “37년 전 스무 살의 앳된 여자가 소방복을 입고 있으니, 마치 나를 우리 안의 원숭이처럼 바라보곤 했다.

조직 내에서도 고 소방사라 부르지 않고 ‘고양’이라고 불렀다. 양성평등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가 힘든 시기를 이겨낸 것은 ‘여자도 못할게 없다’며 적극적으로 일을 했기 때문이다. 하루, 일주일, 한달, 1년에 걸쳐 계획을 짜고 차근차근히 목표에 도전했다. 그 다음 해에는 목표를 더 높게 잡았다.

남성들을 제치고 승진한 비결을 묻자, 고 본부장은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는 ‘승진시험’을 꼽았다. 말단 소방사에서 간부인 소방위까지 시험으로 승진을 한 그는 제주소방본부에서 첫 여성 인사주임을 맡았다.

고민자 광주소방안전본부장이 간부들과 광주의 한 전통시장에서 화재 예방 점검에 나섰다.
고민자 광주소방안전본부장이 간부들과 광주의 한 전통시장에서 화재 예방 점검에 나섰다.
광주 광산소방서를 방문한 고민자 본부장이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광주 광산소방서를 방문한 고민자 본부장이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주요 요직을 거쳐 제주동부소방서장에 오르다

소방조직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그는 제주소방서 예방기획담당, 도소방본부 소방교육대장, 예산장비담당에 이어 2015년 소방정으로 승진, 본부 119종합상황실장에 임용됐다. 소방정은 경찰의 총경(서장급)에 해당된다.

고 본부장은 2016년 전국 두 번째, 제주에서는 최초로 서장을 맡으며 제7대 제주동부소방서장에 취임했다.

현장 지휘관으로서 관할 지역을 구석구석 살펴보기 위해 조천읍에서 남원읍까지 올레길 전 코스를 걸으며 답사를 했다.

동부소방서장 당시 우도에는 연간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방문했다. 전기오토바이 투어가 인기를 끌었는데 화재가 잦았다.

그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화재 원인을 의뢰하고, 중앙소방학교에서 화재 발생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수입산 배터리를 여러 개 연결한 것이 과열이 됐고, 화재 원인으로 나왔다.

고 본부장은 당시 전국의 배터리 공급업체에 안전장치가 설치된 배터리를 납품하도록 했다.

그는 2018년 소방청 근무를 지원했고, 심사에 통과하면서 그해 중앙119구조본부 상황실장을 맡게 됐다.

2016년 제7대 제주동부서장에 취임한 고 서장이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16년 제7대 제주동부서장에 취임한 고 서장이 직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145만 광주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다

그는 중앙119구조본부 상황실장을 맡으며 2019년 4월 발생한 강원도 대형 산불을 이틀 만에 진압했다. 하지만 6개월 후 시련이 닥쳤다.

그해 10월 31일 중앙119 소방헬기가 독도 인근 바다에 추락, 조종사·정비사·구조대원·구급대원 등 5명의 소방관이 목숨을 잃었다.

조업 중 손가락이 절단된 선원을 구조하기 위해 출동했던 소방대원 5명 전원이 순직했다.

중앙119구조본부 구내식당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했던 남녀 후배 대원을 잃은 슬픔 속에서도 그는 영결식을 책임지고 준비해야 했다.

순직 소방대원들을 떠나보내는 영결식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아들과 딸을 한명 씩 둔 고 본부장의 남편 역시 현직 소방관이다. 뜨거운 화염 속에 들어가야 하는 소방관이기에 앞서 한 가족의 아빠이자 남편이다.

고 본부장은 “대형 화재가 날 때면 소방관의 아내들은 가슴이 아려서 밤새 뒤척인다. 저 역시 ‘소방관의 아내’여서 그 심정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인구 145만명의 광주광역시의 재난 예방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다. 5곳의 소방서와 24곳의 119센터, 1곳의 소방학교에 소속된 1500여 명의 소방관을 이끌어 가고 있다.

차갑고 냉철한 여성 본부장이 아니라 따뜻하고 자상한 본부장으로서 광주시민들을 살펴주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의 꼼꼼한 업무 스타일은 다음 달 광주에서 개관하는 ‘빛고을 국민안전체험관’에 반영됐다. 산악안전체험관의 무등산 사계절은 화가의 작품으로 꾸며놓았다.

한국 소방 역사에서 최초로 여성 소방준감에 오른 고 본부장은 “사람은 부드럽고 대하고, 조직은 긍정적으로 이끌어 가면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다”며 “제주에서 근무할 당시 소방대원은 물론 의용소방대원들도 동료로서 한 가족처럼 대하다보니 지역 맞춤형 안전대책이 수립됐고, 소방조직의 결집력을 더욱 높일 수 있다”고 말을 맺었다.

고민자 제주동부소방서장이 송별회에 앞서 직원들과 함께 한 모습.
고민자 제주동부소방서장이 송별회에 앞서 직원들과 함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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