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의 면기난부(免飢難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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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논설위원
변호사는 ‘법률에 규정된 자격을 가지고 소송 당사자나 관계인의 의뢰 또는 법원의 명령에 따라 피고나 원고를 변론하며 그 밖의 법률에 관한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법정에서 사건을 변론하고 법적 권리와 의무에 관해 조언하며 소송ㆍ비송사건 등 제반 법률사무를 수행한다.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 변호사법 제1조 제1항에 규정된 책무다. 하지만 ‘조개는 칼로 열고 변호사의 입은 돈으로 연다’는 영국 속담처럼 금전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다. 법률 서비스 제공 대가로 적정한 수임료를 받아야 생존권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호사가 되기 위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2년)을 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별도의 입법을 하지 않는 한 내년부터 사시제도는 폐지된다. 다른 하나는 3년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하고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는 거다.

변호사는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고소득 전문직으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시에 합격하는 게 신분 상승의 초고속 사다리이었던 시절 얘기다.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사시에 붙어 변호사가 되면 온 집안의 영광이자 동네의 자랑이었다. 부와 명예도 함께 뒤따랐다.

▲조선시대에도 변호사 구실을 하는 이들이 있었다. 소송전문업자인 외지부(外知部)가 바로 그들이다. 송사(訟事)를 맡은 관원이 아니면서 밖에서 그런 행세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법과 소송절차에 밝아 소장을 써주거나, 소송대리인으로 소송을 진행하고, 이기면 미리 약정한 돈을 받는 일종의 변호사였다.

원래 이 명칭은 장례원을 도관지부(都官知部)라고 지칭한 데서 유래했다. 장례원(掌隷院)은 노비 문서와 노비 관련 소송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던 관사로 전해진다. 한데 장례원에 속한 관원도 아닌데도 바깥(外)에서 소송을 대신해준다고 해서 외지부로 불러졌다. 법을 잘 모르는 백성들이 활용했다.

▲해방 후 제주 최초 변호사는 고(故) 양홍기(1894~1974년) 변호사다. 그는 제주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근무하다 1947년 변호사로 활동했다. 그 뒤 1961년 제주도변호사회가 창립됐고, 당시 회원은 5명이었다. 1970년대 도내 변호사는 두 자릿수를 넘어섰고 2007년에 30명으로 늘었다.

2009년 로스쿨 도입으로 변호사가 다수 배출되면서 2014년엔 50명으로 급증했다. 이어 최근에 100명 시대를 맞아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했다. 이제 변호사는 일부를 제외하고 ‘배고픔은 면하되 부자되기는 어렵다’는 면기난부(免飢難富)의 직업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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