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부터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걱정거리가 생긴 나와 함께 밤을 같이 하더니 검은 구름이 마치 걱정 말라는 듯이 손짓하며 재빨리 떠나고 새벽부터 하늘이 맑기 시작한다.


청명한 아침 창가에 앉아 따끈한 커피 한 모금에 머리가 맑아 지면서 내 메모 공책을 다시 뒤적인다. 로댕 가리가 쓴 ‘인간의 조건’이란 책의 한 구절이 눈에 띈다.


“무엇이든 영원한 것이 없으니 너무 고심하지 말라. 다만 느끼고 배워라. 세상의 부귀영화도 마음의 평안도 영원하지 않으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 다만 알고 성숙하라. 네가 느끼고 배우고 성숙해도 영원하지 않으니 열심히 알리고 위로하며 사랑을 베풀라. 주위가 쉽고 평안하리라. 서두르지도 말며 쉬지도 말라.”


이 멋진 말을 공책에 써놓고 몆 번이고 읽었건만 왜 생활에는 적응이 잘 안 되는지 멋쩍게 웃으면서도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가끔 생각나는 오래전 일이 또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건널목에 서 있다가 길을 건너려는데 반대편에서 건강이 안 좋아 보이는 뚱뚱한 할머니를 마르신 할아버지가 부축하시며 길을 건넌다. 건널길에서 두 분은 생사가 달린 양 온 힘을 다해 움직인다.

 

두 분은 진지한 표정으로 한발 한발 힘들게 옮기시는데 나는 건너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다 건넌 후 마주 보며 안도의 미소와 순진한 눈길이 너무 아름다웠다.


아! 저렇게 아름다운 그림이 또 있을까? 두 분의 아름다움이 내 가슴에 감동을 주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두 마음이 하나가 됐음을 보여주는 저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행복의 양은 고통의 양과 같다고 하듯이 저 할머니도 젊었을 때는 날씬하고 건강하셨을텐데 가슴이 찡해온다. 마치 내일의 나를 보는 듯하다.


늙음이란 외모를 말하고 마음은 더욱 숙성이 돼 아름다워지는가 보다.


간디는 “사람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선해진다”고 말했다.


두 분도 오랜 세월 부딪히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모두 이겨내고 지금은 무르익은 정을 보여준다. 


모두들 짊어진 무게가 버겁겠지만, 참는 만큼 말년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상을 받는 것 같다. 참거나 노력으로 안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고비는 넘어가는 법이니 더 참아보면 아픈 만큼 회복의 기쁨이 더 클 것 같다. 그냥 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에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어차피 내 짐은 내 짐이기에 이 짐을 벗을 것 같은 다른 길을 택해도 다른 모양으로 내 어깨 위에 그냥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떤 때는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더 참아보면 그래도 다니던 길이 더 쉬운 법이다.


너무 손익 계산에 밝은 것보다는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옳은 길을 가려는 진심이 후에 더 나은 행복을 가져온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피할 수 없이 몸은 늙어 가지만 짐이 조금씩 가벼워 지면서 마음이 평화로워져 저 할아버지·할머니처럼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나 보다. 행복은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긍정적 내 마음가짐이고 행복의 방해자는 나 자신이라고 한다.


함덕 해수욕장 주변 자연의 아름다움에 서성이면서 저 자연에 얹혀 움직이는 사람들도 지금은 퍽 아름다워 보인다. 모두가 각자 열심히 노력하면서 자기의 삶을 수행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우리 모두 뒤돌아보면서  후회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고 웃음 질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으니까. 하얀 머리에 얼굴엔 잔주름이 가득하고 눈이 침침해도 노래 가사처럼 우린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익어 가는 중이라 생각하고 평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