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제주시 산지항과 일본 오사카 항로에 취항한 군대환 여객선.

강문범姜文範:1910(융희4)~1948(미군정기), 광주 학생 운동 당시의 항일활동. 강형규姜衡奎의 장남으로 산남 중문면 상예리<상-열리>에서 태어나 중문리<중물>의 진수의숙進修義塾에서 4년을, 1926년 제주공립농업학교를 마쳤다. 1929년 7월 전남공립사범학교(광주사범 전신) 2학년에 재학 중 독서회에 창립 멤버 14명 중 강문범, 이신형李信珩(조천), 신휴근愼庥根(화북) 등 3명은 제주 출신이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역 앞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교 학생들과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광주고보 학생 3백 명과 전남공립사범학교 학생 및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광주시내의 요소에서 항일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신형李信珩(1, 조천)도 광주사범 학생으로 운동에 참여,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강문범은 1930년 10월 18일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 받고 항소하니 1931년 6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형을 선고했다. 출옥 후 1932년 혁우동맹革友同盟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이어 1940년 김성숙이 설립한 가파도의 개량 서당 신유의숙辛酉義塾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섬 사들에게 민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이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이 신유의숙의 교사들은 가파 출신으로 이도일李道一, 이원정李元貞, 김태능金泰能, 김한정金漢貞, 김옥천金玉千 등과 이신호李辛祜(모슬포), 강문범姜文範(중문), 송종현宋鍾炫(신촌), 장종식張鍾植(삼도) 등이 번갈아가면서 들어가 가르쳤다. 이들은 모두 배일파排日派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신진 청년들이었다.   마침내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청년 운동을 하던 중 1947년 3·1 기념 시위사건과 1948년 4·3 사건이 일어나 이에 연루되었다. 앞서 서귀포경찰서 중문지서에 구금, 1948년 12월 4일 천제연天帝淵에서 총살당하였다. 뒤에 복권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독립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강문석姜文錫:1906(광무10)~?(월북), 중국 상해에서 한인반제韓人反帝동맹, 조선공산당의 항일활동. 본관은 진주, 강기룡姜基龍의 장남, 산남 대정읍 안성리<대정-골>에서 태어났다. 1934년 5월 30일 오사카공소원大阪控訴院에서 징역 5년형을 치렀다. 조선인공朝鮮人共 상업성商業省의 부상副相을 역임. 앞서 1941년 예비 검속하였다. 1945년 1월 김달삼은 강영애姜英愛와 결혼했다. 강영애는  바로 강문석과 김성화金成花(상모)의 큰 딸이다. 강문석은 1948년경 월북 후 동년 8월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피선, 1956년경 소위 남로당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강문석은 추사秋史 김정희 유배 때의 집 주인 강도순姜道淳의 증손자가 된다. 대정공립보통학교 4년을 졸업하고 제주심상소학교를 거쳐 경성고보(현 경기고)를 졸업한 후, 늘 가정에서 추사의 애국관을 어릴 때부터 깊이 듣고 추사를 흠모하며 그 뒤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다. 이래서 그는 1925년 4월 모슬포에 한남의숙漢南義塾을 설립하여 4년 과정의 초등 교육을 담당하는 개량 서당으로서 면모를 갖추었다. 모슬포의 광선의숙光鮮義塾, 가파도의 신유의숙辛酉義塾과 함께 후일 대정 지방의 항일 인사를 배출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의숙이었다.

 

1928년 4월 도쿄로 건너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교유하고 토쿄 일반 노동조합에 가입, 1930년 4월 제주·오사카간 여객 항로를 개설하고 동포끼리 자주운항自主運航으로 이를 장악하기 위하여 동아통항東亞通航 조합 결성에 참여했다. 이 무렵 전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에 가입하여 화학노조 상임위원으로 활동, 이때의 전협全協은 일본공산당의 외곽단체였다. 일본공산당의 당원으로 1931년 9월 상해로 건너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강소성江蘇省위원회 법남구法南區 한인지부에 배속되어 책임자로 지냈다. 이 무렵 상해 한인반제韓人反帝동맹에 참가하여 선전부장을 역임, 1932년 10월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의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조봉암曺奉岩(강화), 홍남표洪南杓(양평) 등 5명과 함께 동년 12월 3일 인천항으로 호송된 후 신의주에 있는 평북平北경찰부로 압송되었다. 1939년 국내에서 박헌영朴憲永과 표리일체가 되어 당 재건을 위하여 ‘경성京城 콤클럽’의 멤버로 활동하였다. 이때 전향을 거부하자 청주형무소에 투옥되고 1945년 8월 16일 석방되었다.


강문석은 해방된 조국에서의 활동이 긴박해져 동년 9월 조선공산당 서기국원書記局員 겸 선전부장, 또 산업 노동조사소 소장이 되면서 박헌영의 손발이 되었다. 1946년 1월 서울에서 열린 모스크바 삼상三相회의 지지 군중대회에 참석, 반탁反託 진영으로부터 테러를 당해 부상을 입었다. 동년 조공朝共을 대표하여 일본공산당에 파견, 서기장 도쿠다<德田球一>와 회담하였다. 동년 10월 조선공산당 선전부장 및 중앙위원, 또 민주주의민족전선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남로당南勞黨 제주도당부 조직 대회에 참석하여 격려하고 사위 이승진李承晋(영락)에게 자기가 혁명 운동 때 사용하였던 가명 김달삼金達三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남조선 혁명을 지시하였다. 1950년 10월 노동당 중앙위 사회부장을, 1953년 8월 노동당 중앙위 제3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 탱자나무로 둘러싸인 추사 유배지 모습. 추사가 유배 때의 이 집 주인은 강도순으로, 강문석의 증조할아버지다.

<필자의 변> 현 ‘추사유배지’는 강문석姜文錫의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집터이다. 강姜은 일제강점기 한남사숙漢南私塾을 개설한 민족주의자였으나 후일 공산주의자로 변신하여 중국 상해上海에서 김달삼金達三이란 가명假名으로 항일운동에 참여, 김성삼金成三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박헌영朴憲泳과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평생 항일투쟁을 일삼았으나 제주에 나타나지는 않았다. 일제 말기 일제 당국은 그를 예비구속하여 감옥에 넣었으나 많이 변절하더라도 그는 절대로 변절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박헌영과 일심동체가 되어 남로당의 극좌투쟁을 일삼아 한때 지하활동地下活動에 들어갔으며, 북한 정권이 수립되자 월북했으나 그의 종말은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강문식康文植:생몰년 미상, 경찰서장, 본관 신천,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제주4·3사건이 일어나 경찰력警察力의 강화하는 차원에서 1949년 1월 18일에 제주도경찰국 산하에는 기존의 제주경찰서(서장 유근억柳根億,.전남 출신 관할구역:제주면.애월면.조천면) 와 서귀포경찰서(서장 김호겸金浩謙.경기도 출신, 관할구역:서귀면.중문면.남원면) 외에 새롭게 두 경찰서가 출범出帆하였다. 앞서 1949년 1월 18일부터 1950년 12월 1일까지 제주도경찰국 산하 초대 모슬포摹瑟浦경찰서장(서장 강문식, 관할구역:대정면.한림면.안덕면), 1953년 8월 19일부터 3개월 동안 성산포城山浦경찰서장(관할구역:구좌면.성산면.표선면)으로 재임하였다.

 

강문원姜文源:1897(광무1)~1950(납북), 은행 중역. 충청남도 도지사. 일명 강문유姜文儒, 본관은 진주, 강경모姜景模의 장남으로 서귀포시 서홍리<서-홍로>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가 강성건姜成健의 숙부, 고베<神戶>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식산은행 행원으로 입사, 이사로 승진하였다. 만주滿洲로 건너가 은행계에 종사하다가 광복 후 서울은행의 계리사計理士로 취임하여 명성이 알려졌다. 1949년 충청남도 도지사로 발령되어 재임 중 6·25 전쟁 때에 납북됐다. 강문원의 부친이 ‘하논’ 성당의 초기 가톨릭 신도가 되어 개화문명을 수용하였다. 이로써 아들에게 신식교육을 가르쳐 1916년 3월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일본으로 유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