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심판
역사의 심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방영 제주한라대학교 교수 관광영어학과 논설위원

‘역사는 나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이다.’

지난달 25일 타계한 피델 카스트로가 했던 말이다.

1953년 그가 부패했던 바티스타의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몬카다 병영을 습격했다가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변호했던 말이다. 당시에 그는 심장이 총알로 뚫린다 해도 조국과 정의로움, 인류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 않을 것이며, 진실을 가리는 온갖 더러운 수단들을 낱낱이 파헤쳐 세상에 알리겠다는 말도 했다.

‘쿠바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는 자신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며,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를 기관이나 광장, 공원, 등의 이름으로 사용하지 말라고 강조하며 개인의 우상화도 막았다고 한다. 산티아고데쿠바에 있는 그의 묘지는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숨진 반군 병사들의 묘지 옆이라고 한다.

병영 습격 2년 후 특별사면으로 석방된 피델 카스트로는 멕시코에서 아르헨티나 출신인 체 게바라를 만나며, 미국의 시사주간 ‘타임’은 체 게바라를 ‘카스트로의 두뇌’라고 했다.

두 사람은 1956년 게릴라전을 시작. 3년 만에 바티스타(당시 쿠바의 독재정권)를 축출하였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그 두 사람은 미국에 종속돼 있던 쿠바의 경제 구조를 바꾸기 시작했다. 농지개혁법을 공포하고, 사탕수수 작물 재배를 지배하던 미국의 대농장 시스템을 해체하며 외국인들의 농지 소유를 제한했다.

1961년에는 미국 기업을 국유화하고 집단 농장을 만들면서 경제적인 독립을 추진했다. 또한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며, 문맹률을 대폭 내렸다.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던 체 게바라는 흐루시초프 체제하에 변해가는 소련과 점차 1인 절대 권력체제를 추구하는 카스트로에게 실망하여 1965년 쿠바를 떠났다.

‘잔혹한 지도자들은 그 잔인함을 전복시킨 새로운 지도자로 대체될 뿐’이라는 체 게바라의 말은 바뀌는 정치가들이 한결같이 변질과 부패의 현실을 낳는 것을 지적하는지도 모르겠다.

카스트로의 49년 재임 기간 동안 쿠바는 소련의 핵미사일 설치를 허가하는 등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위태로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또한 약 1만5000명의 쿠바인들이 총살, 교수형, 폭사를 당하거나 악명 높은 카스트로의 옥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독재와 인권 탄압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캐나다 수상 저스틴 트루도는 카스트로를 ‘거의 반세기 동안 자기 국민을 위해 봉사한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평했다.

그가 무죄인지 유죄인지 판단할 주체는 그 나라 사람들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카스트로가 했던 모든 일의 기반은 쿠바 국민들의 이익을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으로 두었다는 점이다. 개인의 영달만을 위해 권좌에 군림했다면 지금까지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같다. 자국민들에게 과거 친미 독재 정권과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았기 때문에 용인되었을 것이다.

국민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여기고 그 믿음을 열정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정치가 자격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우리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희귀한 종의 사람이 아닐까 싶다.

요즘 보이는 정치가들은 입으로는 애국을 말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는데 그들의 행한 업적을 보면 사리사욕 채우기에만 몰두한 경우가 넘쳐나서 그 해악이 막심하다. 이어지는 새로운 정치가들에게 새로이 희망을 걸 수 있고 믿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한 국민이 될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