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번 버스를 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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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간밤에 꿈을 꿨다. 제주시 동문로터리에 세워 있는 해병혼탑을 허물고 인도블록을 덮는 황당한 꿈.

그 바람에 잠에서 깼다. 6·25전쟁 때 위용을 떨친 제주출신 해병 3,4기의 행적을 기리는 탑인데, 말도 안된다.

일전, 삼양 옛 검문소 앞 교차로 화단을 들어내던 게 떠올랐다. 꿈도 작은 게 크게 몸체를 불리며 전이하는가.

소한(消閒) 삼아 시내 나들이에 나섰다. 함덕서 인제 거쳐 노형 가는 20번 버스를 탔다. 차안이 한가해 마음이 유여하다.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난다.

우둘투둘한 신작로를 먼지 풀풀 날리며 늑장이던 주둥이 나온 버스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죽 벋은 진드르 길을 지나더니 교대 앞을 거친 버스가 그새 동문통 등성이를 내려서고 있다. 속도시대다. 책 장 넘기다 눈감은 지 십여 분 만이다.

5,60년대의 동문통 길,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질척여 팥죽 같다고 했다.아마구쓰(비신)를 신던 생각이 난다. 장화로 무장하기도 했다.

산지천 따라 길게 늘어섰던 복개천 상가, 동문다리에 인접해 밀가루 가게 ‘제일상회’가 있었고 나는 그 집 외아들 가정교사를 했다.

그때 북교 6학년, 이제 칠순이 목전인 김 사장.

열 일고여덟 살 자취생, 일 년에 몇 번 허할 때 찾던 동문시장 할머니 집 국밥 생각에 군침이 돈다.

시외버스가 서던 로터리 천변엔 수십 명 지게꾼들이 졸음을 쫓고 있었지. 시장 서쪽 입구 김약국이 커 보이던 시절, 우생당과 라이카사에 눈을 주며 걷던 원정로에서 관덕정 길은 제법 멀었다.

중앙로의 오래된 양과·안경점이 낯익은데, 땅속에 들어선 지하상가는 아직도 기억 속에 경이로 남아 있다. 버스가 머리를 산 쪽으로 틀 때, 잠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탑동으로 난 길 너머로 덤벼드는 갈맷빛 바다. 제주시는 아름답다.

길 서쪽 옛 도립병원 뒤뜰에 오동나무가 서 있었고,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고3을 넘지 못한 제자 박 군의 빈소에 분향하던 일이 떠오른다.

아들을 부르며 한밤중 도심을 흔들던 어머니의 곡성이 귓전에 잦아든다.

삼성혈은 예전 초등생들 소풍 장소였고, 광양은 한때 상권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청 앞 거리는 북적이는가. 구제주 건물들은 그냥 낮게 누웠는데….

신제주는 제주의 과거를 매몰해 그 터수에서 성장하는 건 아닌지.

옛 제주가 퇴락한 곳엔 양속도 신화도 없다.

연동에서 노형으로 우쭐대며 흐르는 표정 없는 빌딩의 숲, 빛깔과 소리와 유행의 거대한 띠가 출렁댄다. 빛깔은 현란하고 소리는 소란하고 유행은 시민들을 설레게 할 뿐.

면세점 주변만 아니다. 말에 귀 세우지 않아도 행색으로 안다.

중국인 관광객들, 대로를 누비던 유커(遊客)와 둘레를 거닐던 싼커(散客)들이 이젠 골목에 뜬다.

제주시가 둘로 쪼개졌다. 문제는 둘의 우심한 불균형이다.

신제주처럼 서울의 강남을 옮겨 놓자는 게 아니다.

구제주는 너무 버려졌다. 낮은 건물에 먼지가 더께로 앉았고 거리에 나온 주민들 처진 어깨가 서럽다. 동·서·남문통과 용담의 해묵은 얼굴에 깊게 주름이 골로 파인다.

감성의 눈으로 바라본 게 아니다. 구제주가 도시경관 너머, 경제와 도시디자인 속으로 깨어야만 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왠지 눈앞 고샅길이 가파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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