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출처=해녀박물관 제공
 

제주 해녀가 최근 제1호 국가중요어업유산에 선정되면서 그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던 진면목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새해에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과 세계중요농업유산 등에 이름을 올리며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제주도민들의 성원과 관심이 절실하다. 
이에 따라 본지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 있는 제주 해녀의 가치와 그 이면에 감춰진 역사, 문화콘텐츠 등을 집중 소개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제주 해녀의 역사=해녀(海女)는 ‘잠녀(潛女)’ 또는 ‘잠수(潛嫂)’라고 불리며 역사의 한 획을 그어왔다.
제주 해녀의 경우 주로 ‘녀’라 불렸으며, 조선시대 고문헌에는  ‘잠녀’로 기록되기도 했다.
제주 해녀의 존재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 13년(503년)에 처음으로 기재됐으며, 여러 정사(正史)에서 잠녀는 ‘진주 캐는 사람’으로 묘사되며 이름을 떨쳤다.

 


특히 조선시대부터는 제주 해녀의 성별 분업이 이뤄졌던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 ‘포작’이라 불리던 남성들은 주로 깊은 바다에서 전복을 채취했으며, ‘잠녀’로 불리던 여성들은 미역과 청각 등의 해조류를 채취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포작’은 사라지고, 물질은 여자들이 주로 전담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직업적 해녀는 1900년대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했다.
1895년 경상남도로 첫 출가 물질을 떠난 제주 해녀들은 우리나라 육지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 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까지 행동 반경을 넓혔다. 

 


이에 1930년대 국내·외 출가 해녀는 5000여 명에 이르게 됐다.
이러한 제주 해녀들의 출가 물질은 근대 생활사와 함께 민속적 변모 그리고 문화 이동,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문화의 재생산 등을 복합적으로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사라져가는 제주 해녀=해녀가 가장 많았던 1960년대 전후에는 제주에서 물질을 배우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제주사회는 여러 면에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운 품종의 감귤이 도입되면서 제주 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고, 관광 개발이 시작되는 등 제주경제 전반에 걸쳐 대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양식장 난립 등 산업구조 개편에 따라 ‘바다밭’이 축소되는 악영향도 피할 수 없었다. 이에 1970년 1만4000명을 웃돌던 제주 해녀의 수는 1980년에 7804명으로 절반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감소세를 보이며 최근 3년간 연평균 3.4%씩 감소, 2014년 현재 4415명으로 축소됐다.
특히 이 중 60세 이상 고령자가 3685명으로 84%를 차지하고, 50세 이상은 98.5%에 달하는 등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49세 이하 해녀는 점점 감소하고 신규 해녀가 발굴이 되지 않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면서 제주해녀라는 어업자원의 보전과 관리,  활용 방안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백나용 기자 nayong@jeju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