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다람쥐가 속삭이고 돌맹이 위에 머문 바람이 소곤소곤 말을 걸어올 것 같은 산 아래의 풍경을 동경하던 무대 디자이너.

 

시간과 사람에 치이며 하루가 멀다하고 대형 세트를 만들었다가 다시 허물기를 수십 아니 수백차례. 청춘의 절반을 무대 디자이너로 후회없이 치열하게 살았으니 제2의 인생을 산다면 평소 동경하던 소담하고 정겨운 산 아래의 풍경처럼 살겠다는 기타리스트 ‘산하(山下.47)’.

 

그가 얼마나 자연친화적인 삶을 추구하고 있는지는 ‘산 아래’라는 뜻이 담긴 예명으로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보통 무대는 3일 정도 공연 때만 사용되고 폐기처분 되거든요. 무대를 만들어내기까지 온갖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지만 공연이 끝나는 동시에 와르르 무너뜨려야 하는 허무함, 그 커다란 세트가 재활용도 할 수 없는 쓰레기로 순식간에 변해버리는 것에 대한 회의감, 환경에 대한 미안함, 뭐 이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가슴을 짓누르더라고요.”

 

사실 그는 이탈리아에서 5년간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공부한 엘리트다.

 

88올림픽이 열리던 해, 대학생 신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내한 공연을 온 세계적인 오페라단체인 이탈리아의 라 스칼라오페라단을 만나서 느낌 감동을 이탈리아 유학길로 옮길 정도로 오페라무대 디자인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었다.

 

하지만 항상 뭔가에 쫓기는 듯 삶에 2% 부족함을 느껴던 그는 우연히 잡은 통기타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오페라 무대를 만들면서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아요. 연출가도 만나야 되고 배우, 관객 많은 사람의 의견을 반영하고 배려해야 하니까 그러는 동안 제 자신은 저 멀리 내팽개쳐져있는 거죠. 그런데 통기타를 잡았는데 제 맘대로 해도 되는 거에요. 신이 나더라고요.”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산하는 중학교시절부터 기타를 치고 그룹사운드 활동도 했었지만 언제까지 기타는 그냥 취미일 뿐이었다.

 

그러던 그는 기타를 통해 지루한 일상의 재미를 찾으며 기타와 함께 하는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 인생의 ‘펼침장’으로 어쩌면 제주는 당연했다. 

 

“숲, 바다, 도시와 달리 여백이 있는 제주는 정말 좋았어요. 여행자가 아니라 여기서 살고 싶다 생각했죠.”
막연한 동경은 바로 실천으로 옮겨져 지난해 8월 가족과 함께 본격적인 제주살이를 시작했다.

 

6년 전 시작한 기타리스트의 인생은 제주에서의 삶이 시작되면서 막이 올랐다. 수년간 준비하면서도 마무리 하지 못했던 첫 앨범 ‘달한가 한’도 올해 초에 출시됐다.

 

즉흥적인 그의 음악은 자연친화적이고 소재 또한 모두 자연이다.

 

기존의 음악이 반주와 노래가 있다면 그의 음악은 반주와 멜로디가 있는  ‘핑거스타일(fingerstyle)’로 분류된다. 기타를 튕기기만 하지 않고 두드리기도 하고 기타줄을 뜯기고 하는 것이 그의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자유로우면서도 조용하다. 소소한 일상을 추구하듯 자연이 발밑을 간질이고 귓가에 와서 속삭이듯 곰살맞다.

 

특히 달에 관한 열 가지 이야기를 담은 첫 앨범에는 미국의 유명한 장인이 만들었다는 국내 유일의 하프기타 연주곡도 포함돼 있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명상 음악으로도 일품이다. 몸과 정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며 수년간 요가를 수련하는 아내와 함께 산책명상, 바다명상 다양한 명상을 하고 있기도 하지만 제주에서만 가능한 소리명상을 기획중이다. 물론 음악은 산하의 몫이다.

 

무엇보다 제주에서 그가 하고 싶은 것은 지금 한창 진행되고 있는 음악 작업실이자 스튜디오에서 대중적인 음악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꿈 많은 음악인들의 인큐베이터가 되는 것이다.

 

“음악을 만들어도 상품으로 제작되지 않으면 빛을 발할 수 없잖아요. 그동안 하나씩 하나씩 사뒀던 장비를 모아서 음악을 녹음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만들고 있습니다. 저처럼 자연친화적인 음악을 추구하는 음악인들의 녹음실로 제공하려고요.”

 

그는 음악을 녹음해주는 일종의 재능기부를 하고 작업실 옆에 카페를 마련해 다시 재능기부를 받아 공연도 하고 음반을 판매할 예정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한라산 밑에서 제주의 사람들과 또 다른 ‘산 아래’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